모호함의 대가 오에 겐자부로 소설은 기억도 나지 않을 오래 전, 1990년대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작품을 읽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내용인지 어릴 때라 그런지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의 문체 만큼은 기억이 난다.
1.모호함의 대가 오에 겐자부로 특유의 문체

1.1. 모호성
사람들이 현학적이라고 할 만큼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좀 모호하고 난해하다. 모호함의 대가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길고 복잡한 문장이고 수식어도 많고 단문보다는 장문이 많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문체가 좋다. 딱딱 끊어지는 단문이 요즘 트렌드고 가독성이 좋고 어쩌구 저쩌구하지만 만연체가 훨씬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를 모르겠다. 기억보다는 여운이 맞는 거겠지만.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인생도 어렵고 복잡할수록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계속 생각나는 작품은 좋은 작품 좋아하는 작품으로 분류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그게 나의 지적 허세라고 해도 상관 없다.
오에는 문체에는 은유도 풍부하지만 뭔가 애매하고 모호함 속에 깃든 적확함 혹은 정확함이 있다. 빠른 것보다는 느린, 기쁨보다는 슬픈 등의 감정의 그라데이션이라고 해야 할지 뭔가 그럴듯한 특유의 표현이 있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신선했다고 해야 하나. 내 기준에 내가 너무 원하던 표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줄치면서 읽었으면서 스토리는 하나도 생각 안 나고 이렇게 추상적인 문체의 느낌만 기억이 나는 거다.
이런 것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겠으나 애매함 모호함, 중간적, 그럴듯한 그의 문체를 나는 너무 사랑한다. 아니 사랑했다.
오에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 첫 장의 한 구절이다.
모든 이들이 살갗에 조금씩 남아 있는 낮 동안의 온기의 기억을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더듬는 듯한 몸짓을 하며 모호한 한숨을 쉬고 있다.
그의 문체는 이렇게 모호하고 적확하다.
1.2. 강조점
모호함의 대가는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그리고 때로는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 같은 방식도 내 스타일이다. 글자 위에 점을 찍는 거 이게 방점인지 뭔지 헷갈렸는데 오에가 찍는 것은 강조점이라고 한다. 그의 글 중에 이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디든 그의 글에는 강조하고 싶은 점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지문 같은 문체라고 봐도 되려나? 그 부분에 관해 언급한 사람은 많지 않은 거 같아서 확신은 없다.
오에가 워낙 장문의 정신없이 글을 쓰는 통에 작가 자신도 강조점을 표기하나 싶기도 하다. 그의 복잡한 문체에 강조점은 필수로 보인다.
그밖에 오에의 복잡하고 종교적이며 신화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모든 것들이 그의 글마다 담겨 있다. 이것 역시 딱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단숨에 읽히지가 않는다. 개인적인 체험 빼고 순식간에 읽은 책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체험이 제일 별로였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2.주요 작품들
- 사육 1958: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단편으로 전쟁 중 추락한 흑인 병사를 마을 사람들이 사육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고발하여 수상한 작품이다.
- 기묘한 아르바이트 1957: 오에 겐자부로가 대학 신문에 게재한 초기 작품이다.
- 사자의 잘난척 1957: 사자의 잘난척도 그의 초기 작품인데 죽음과 생존 죄책감과 정당화, 이런 주제를 그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담고 있다. 꽤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는 모두 물체다. 죽음은 모두 물체다… 인간이란 참으로 별의별 것에서 다 자부심을 가지는 족속들이다…그 희망의 징조가 범람하는 강누데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도 흐지부지 녹아 버렸다.
살아있는 인간과 대화한다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어려울까. 언제나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 버리고 거기에는 늘 허무함이 붙어 다니는 걸까..
- 개인적인 체험 1964: 뇌에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모티브로 쓴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이다. 상황 혹은 현실을 도피하고픈 주인공이 고뇌 끝에 아이를 받아 들이는 과정이 사소설 같지만 전반적인 스토리는 전혀 다르다.
- 만엔 원년의 풋볼 1967: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 중 대표로 꼽힌 작품 중 하나이다.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폭력, 혁명, 좌절, 그리고 형제의 비극적 관계를 통해 일본의 근현대사를 그려낸 소설이다.
- 하마에게 물리다 1985 연작 단편소설집으로, 일본적군파 사건의 생존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 조용한 생활 1990: 장애를 가진 오빠와 그를 돌보는 여동생의 일상을 통해 관계의 의미와 삶의 아름다움을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 익사 2009: 작가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가 자신의 문학 세계에 미친 영향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3. 예감의 문학
슬픈 생각, 슬픈 노래를 자주 부르면 슬픈 일이 자주 생긴다고 하듯이 오에 겐자부로 개인의 삶도 불안하고 우울한 정조로 인해 불운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불안과 혼란 무언가 상실감을 느낀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해봤다. 오에의 소설들은 신기할 정도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재앙에 관한 일들이 예감처럼 그리고 예언처럼 적시된다. 그나 1950년대 후반 쓴 초기 작품들을 보면 개인적인 불행은 물론 사회적 혼란까지 실제로 벌어진다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물론 비슷한 연령대의 일본 작가들은 그런 트라우마를 겪고 그것을 작품에 투영한 것들이 많다.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 트라우마적 감수성은 일본 작가를 대표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사회적 트라우마도 크겠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의문의 익사로 사망한 것이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 그에게 불행한 결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4. 보편성 확보에는 실패한
다시금 말이 씨가 되고 글이 현실이 된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선뜻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글을 잘 쓰나 못 쓰나 어떤 운명적 사명을 가지고 사는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글로 남에게 인정을 받은 적도 없고 대중에게 글을 제대로 공개한 적도 없지만 아주 어릴적부터 글을 쓰며 살 운명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계시 같은 거였고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수퉁의 꿀술보다 똥술을 받아 먹었을 확률이 높았다는 것도 운명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그런 오에 보다 특출한 재주가 없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오에는 88인생을 살다 가면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현실이 비극이 된 것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은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오에는 결국에 자신의 죄책감과 불운을 모두의 문제로 보고 인간의 존엄성과 구원의 가능성 그리고 공생의 길을 모색한 작가이다. 어떤 곳에서는 그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 작가였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특수한 문제를 보편적 문제로 몰고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이걸 좀더 일반인 시각으로 쉽게 풀어서 얘기하자면,
우린 모두 불행하잖아? 그치? 그러니 우린 좀 더 나은 세상을 찾아봐야해. 이런 화두를 지속해서 반복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런가? 맞아 그렇지, 뭐 이런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거다. 개인의 특수한 심리 상태를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구현을 매우 설득력있게 잘 썼으니 노벨 문학상도 받았겠지. 그런데 노벨 문학상 받은 작가들이 대체로 이런 성향들이다. 작은 것을 너무 크게 만들어 버린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상 받은 작품은 작품성은 인정 받아도 보편성 확보에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본다. 어려운 것이 대단해 보이는 세상은 지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