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격 황후의 탄생
이영애의 뷰티 스토리. 고품격 황후의 미모 혹은 산소 같은 여자로 잘 알려진 국내 최고 미인 반열에 오른 이영애의 뷰티풀 스토리다. 그녀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하는 고 있어 신비로움을 넘어 신기할 정도이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 고비 없이 꾸준히 아름답게 성장한 이영애는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큰 오빠하고는 15살 둘 째 오빠하고는 12살 차이가 나니 상당한 늦둥이라서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스무 살 차이나 나는 남자와 결혼한 배경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가 1931년생이니 마흔에 그녀를 본 것이다.
1986-1990: 하이틴 잡지 모델 시절의 풋풋함
이영애의 연예계 첫 발걸음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하이틴 시절인 1986년 한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주변에 얼굴 예쁜 학생이 있으니 모델로 좀 써보자는 권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이영애는 여러 잡지 모델 활동을 했지만 당시 워낙 출중한 하이틴 스타가 많던 터라 이영애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영애는 타고나길 이국적이고 완벽한 미인에 속하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하이틴 시절 모습을 보면 지금처럼 부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진 않은 것 같고 고급스럽거나 귀티와는 거리가 있었다. 뭐랄까 당시 선호하는 용모는 하희라처럼 눈코입 모든 부분이 동글동글한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상아, 김혜수, 강수연 조차도 이목구비가 동글동글하다. 이영애는 비교적 뾰족하고 날카롭게 생겼으며 황신혜처럼 완벽하게 이국적인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애매해 보였다.
이영애가 광고 모델로서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무렵은 1990년 투유 초콜릿 광고 이후부터였다. 고3 학생이었을 텐데 친구 아버지의 추천으로 대타 모델로 찍게 되었다고 한다. 띄우려고 지어낸 서사인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아시아 최고 스타 유덕화의 몸값이 너무 비싸서 비중있는 여자 모델을 쓸 엄두도 못 내었을 거다. 당연히 유덕화가 더 빛나야 했을테니 여자 모델은 무명을 쓰는 게 당연했을 테고. 아무튼 이영애는 그와 함께 광고를 찍었다.
투유 광고 이후 이영애가 유명해진 건 절대 아니다. 대중은 유덕화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이영애란 신인 모델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커리어를 쌓기에는 더할나위없는 프로필이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니까.

1991-1995: 산소 같은 여자의 시작
마몽드 화장품과 함께 만든 신화
일종의 타이틀처럼 투유 광고 촬영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찍고, 순전히 자력으로 경쟁에 성공한 것인지, 키다리 아저씨라도 있던 것인지 이영애는 아모레의 신규 레이블 마몽드 화장품 광고의 전속 모델이 되었다. 당시 경쟁 브랜드 화장품 모델들은 미스코리아 출신이거나 잘 나가는 인기 여자 연예인을 기용한 것에 비해 이영애는 완전 무명 그 자체였다.

마몽드는 신선한 마스크의 신인 모델을 채용하여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분기별로 광고는 테마가 바뀌었고 줄기차게 화면을 메우면서 이영애와 브랜드 이미지를 친근하게 유도했다. 그렇게 꾸준히 광고 콘셉트를 바꿔가며 홍보를 하다가 1993년 밍크 브라운 시리즈로 초대박이 났다.
이영애는 비로소 유명세를 탔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화장품도 메이크업도 빛이 났다. 한국 여성들은 마몽드 밍크 브라운 립스틱을 바르며 이영애란 모델을 주목하였다.

이영애의 뒤를 이어 마몽드를 빛나게 한 역대 모델들 리스트는 아래 포스팅을 참조
1990년대 뷰티 트렌드의 변곡점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아무리 여성 인권, 혹은 커리어 우먼 사회라고 하더라도 여배우에 대한 이미지는 백치미 혹은 푼수미를 지향하면서 얼굴은 예쁘되 스마트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외모를 선호했다. 당시는 몸매도 중요하지 않고 그냥 얼굴만 예쁘고 친화력있어 보이면 좋게 평가되던 시기였다.
심지어 이영애는 대장금 촬영 이후 글로벌한 스타가 되기 직전까지 다소 푼수끼가 흘렀다. 목소리도 얇고 허물없이 웃는 것도 있고, 성격상 온세상이 아름다워 모드로 일관한 탓인지 마냥 밝고 가볍고, 지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1997-1999: 이지적 이미지로의 변신
의가형제에서 찾은 자신만의 스타일

1997년의 이영애는 최민수와 함께 사막에서 격정적인 로맨스를 펼친 영화 인샬라는 폭망했지만 드라마 의가형제에서 흥하면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한다. 여의사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러니까 역대 배역 중 가장 온전하고 가장 이영애다운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기 스타일을 찾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1997년의 이영애는 이지적이었고 뭔가 푼수미를 상쇄하는 해였다.
1998년의 단발의 매력
1998년은 보다 획기적인 변신으로 지적인 이미지 굳히기 작전으로 보인다. 앞머리없는 짧은 단발 머리에 가운데 가르마를 한 스타일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뮤직 스타 엄정화의 헤어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1999년의 완성된 아름다움
1999년의 이영애는 가운데 가르마를 고수한 상태에서 장단발로 화사하게 대중 앞에 다가온다. 아마 앞머리가 안어울리는 몇 안 되는 배우가 아닐까 할 정도로 이마를 드러낼 때가 훨씬 아름답다.
1999년에는 참이슬 광고로 산소같은 여자에서 이슬같은 여자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주 이영애의 외모가 물이 팍팍 오르면서 연기도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세기말까지 이영애의 피부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타고나길 여드름성 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기말에 이미지가 갑자기 고급스럽게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는데 특유의 하얀 피부를 강조하며 둥글고 가늘고 옅은 눈썹이 효과적이었다. 눈두덩이는 환하고 눈매는 또렷하며 색조는 최대한 배제하였고 입술 컬러도 옅어지니 화장을 해서 진하고 세보이던 이미지가 급격하게 우아한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2000-2002: 전성기의 시작
2000년부터 이영애는 전분야에 정점을 찍는, 리즈 시절이 찾아온다. 영화, 연기, 광고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초특급 스타로 올라섰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은 특히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IMF도 터지고 사건사고도 많았지만 이영애는 홀로 빛을 내며 돈을 긁어 모았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에서 이영애는 탁월하고 아름답고 진정한 배우의 모습을 구현했다. 그리고 2001년 봄날은 간다 속 이영애는 마치 본성이 그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참 잘했다.

2000년 무렵부터 얼굴에 색조를 빼니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특유의 갈색 눈동자와 하얀 피부가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2003: 대장금과 함께 전설이 되다
2003년은 인생의 대전환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 많이 생겨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대장금 이후 그녀는 한류를 대표하는 스타 반열에 오른다. 국내서도 시청률 50%를 넘게 찍고 아시아 전역에 수출되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시청률 99%가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린 드라마의 여주가 바로 이영애였다.

2005-2009: 브랜드 파워의 절정
친절한 금자씨의 파격적 변신
2005년 이영애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찍었고 ‘너나 잘하세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영화 속 이영애의 캐릭터는 참으로 특별했다. 기존의 차갑고 도시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였으며 대장금의 단아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마저 벗을 수 있던 그녀 인생 최고의 영화였다.

LG와의 완벽한 파트너십
이영애와 LG는 남달리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이영애는 LG관련 광고를 찍을 때마다 독보적인 매력을 발휘했다.
2006년에는 아모레 마몽드 옷을 벗고 LG 화장품 후의 모델로 기용되었는데, 이후 브랜드는 물론 이영애의 이미지도 왕후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된다. 처음에 후의 모델은 2005년 고현정으로 시작되었는데, 2006년 이영애가 후의 모델로 채용된 후 무려 19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다.
2009 인생 제 2막
2009년 이영애는 깜짝 결혼 발표를 한다. 당시에는 재미 교포와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걸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언론의 집요한 취재로 남편의 정체가 알려졌다. 사람들은 이영애가 뭐가 아쉬워서 스무 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느냐며 많이들 수군거렸다.
이영애 남편 정호영은 심은하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으나 파혼하였고 군수업을 하며 조 단위의 재산이 어쩌구 저쩌구 등 숱한 루머가 있어 왔다. 지금도 베일에 쌓인 편이지만 대중은 남편과 나이차가 스무 살이나 나는데 남편이 엄청 동안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당시에는 매우 놀랐으나 이영애가 부친가 마흔살이나 차이가 나고 큰 오빠 하고도 15살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남편 나이가 스무 살 많은 것에 큰 거부감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8월 24일 그녀는 하와이에서 결혼을 하였고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매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2011년 완벽한 쌍둥이의 탄생
2011년 이영애는 어느새 아이까지 낳았다. 어떻게 몸매 변화 없이, 이란성 쌍둥이를 떡하니 낳았는지 축복받은 유전자가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녀 나이 마흔에 쌍둥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고 하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영애 아이들이 옥으로 빚은 것처럼 완벽하게 어여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영애가 임신을 했다는 기사도 임신한 모습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놀랍다. 오직 출산 후 여전한 모습만 살짝 비췄을 뿐이다.

휴롬 신화와 지속되는 광고 파워
2011년에 이영애가 낳은 건 완벽한 쌍둥이뿐만이 아니다. 이영애는 출산 후 곧바로 LG 휴롬 착즙기 광고 모델을 한 이후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게 했다. 어쩌면 저리 쉴새없이 일을 할 수 있는지, 게다가 찍는 광고마다 대박이 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2017년 황후의 품격
이영애는 후의 모델을 한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황후의 이미지를 얻었다. 여왕의 품격을 갖춘듯 기품있는 매력의 절정을 화장품 후에서 탁월하게 잘 표현했다. 이영애 입장에선 후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20년대, 시간을 거스르는 미모의 비밀
이영애에게 놀라운 건 그녀의 재력과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뿐만이 아니다. 가장 놀랍고 부러운 점은 이영애는 50이 되어도 넘치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보통은 이쯤되면 과도한 성형과 시술 부작용으로 얼굴이 불독처럼 울퉁불퉁하거나 누가 누군지 모르게 똑같은 중년 아줌마의 모습을 하기 마련인데, 이영애는 50이 되어도 여전히 건재하게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젊을 때보다 훨씬 분위기도 있고 우아한 매력이 풍긴다.
이제 40대인 최고 톱스타들도 얼굴 급노화로 보기에 당황을 금치 못할 정도인데 이영애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물론 이영애의 일상 모습은 잔주름이 가득하며 여느 중년 여성과 다를 게 없다고들 하지만 꾸며서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여성은 매우 드물다. 오히려 시술이나 수술을 하지 않아서 그녀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2024년 이영애와 함께
2024년 이영애는 중국 최고 미인으로 불린 판빙빙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열 살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데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화장기 없는 일상 모습으로 채시라와 함께 찍은 사진도 둘 다 여전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50대도 과거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2025년 54세 이영애
2025년 이영애는 예전처럼 젊어 보이지는 않지만 나이에 비해서 여전히 앳딘 이미지이다. 화보 촬영시 보정을 한 이미지는 리즈 시절 버금가게 넘치게 아름답다.

이영애의 뷰티 신화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 이영애는 한국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대표 미인이다. 마몽드로 시작한 산소 같은 여자이며 도시적인 이미지에서 2000년대는 참이슬 소주 광고로 이슬 같은 여자가 되었으며 2010년대는 엘지 더 후 럭셔리 한방 화장품 모델로 업계 1위 설화수를 누르는 데 기여하였다.
50대 후반으로 향해가는 그녀는 지금도 지속해서 신화를 쓰고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