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시대의 주술사이기도 한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 시스템, 즉 교류(AC) 전력의 아버지로 불렸다. 에디슨과 전류 전쟁을 한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교류 시스템을 세계의 전력망으로 설계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일론 머스크도 그의 이름을 딴 회사 이름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 기술의 선구자이며 전기 시대의 주술사 그리고 기존 산업의 판도를 바꾸려는 혁신적인 도전 정신을 펼친 시대의 위인이다.

니콜라 테슬라의 성장 배경
1856년 7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국 현재의 크로아티아 스밀란에서 태어났다. 그의 국적은 세르비아계 미국인이며 직업은 발명가, 전기공학자, 기계공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그는 1943년 1월 7일 87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생전에 그의 별명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는데 실험과 기이한 행동으로 미친 과학자라고 보면 된다. 평소 동물을 남달리 사랑하여 그는 말년을 뉴욕 호텔에서 비둘기를 돌보며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명언이 있다.
나의 발명들의 성공은 언제나 목표의 1%에서 이루어졌다. 99%는 실패다.
숫자에 대해서도 유달리 민감한 편이었는데 특히 3,6,9 숫자를 편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니콜라 테슬라는 그의 어머니 두카 만디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테슬라는 종종 자신의 발명 능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의 어머니는 정규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일상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와 기계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타고난 발명 감각과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어머니가 분명히 천재과였던 것이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긴 서사시를 외울 수 있었으며 뛰어난 직관력을 지녔다고 테슬라의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비범한 기억력과 상상력 그리고 직관적인 통찰력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 아버지도 어머니 만큼은 아이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밀루틴 테슬라는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지적이고 학식 있는 분이었다. 상당한 양의 책을 소유하고 있었고 시와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언변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아들 니콜라에게는 엄격했지만 동시에 넓은 지적 호기심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래서 니콜라가 자신을 따라 성직자가 되거나 공학도 보다는 인문학 분야의 학자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궁극에 니콜라의 재능을 인정하고 공과대학 진학을 허락했다.
결과적으로 테슬라의 천재성은 어머니의 실용적 재능과 아버지의 학문적 배경이 뒷받침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정교회 사제이다 보니 존경받는 직업에 안정적인 수입 그리고 어머니는 뛰어난 살림꾼이었기에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어도 끼니 걱정이나 교육을 받지 못할 정도의 빈곤은 아니어서 원하는 공부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테슬라의 뛰어난 천재성
테슬라는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서 복잡한 기계를 완벽하게 구상하고 작동시키는 능력을 보였다. 이것이 훗날 그의 발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테슬라는 본인이 우주의 도서관을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이는 아카식 기록(akashic records)인데 아무래도 남들보다 시각화 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게 여긴 게 아닌가 싶다.
공과대학에 들어가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그는 교수들이 직류(DC)의 한계를 논할 때 그는 교류(AC) 전기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다. 그의 초기 경력은 1881년에 시작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중앙 전신 회사에 취직하여 전화 교환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발명가로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 파리의 에디슨 컴퍼니에서 일하며 직류 발전기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유럽 전역을 돌며 직류 발전기의 문제점을 직접 확인하였고 교류 시스템의 필요성을 확신하였다. 1884년 그는 토마스 에디슨에게 보낸 추천서 한 장을 들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추천서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나는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을 알고 있는데, 한 명은 당신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젊은이입니다.
에디슨과의 전쟁
그렇게 에디슨의 회사에 취직하여 직류 발전기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을 맡았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자신의 직류 시스템을 개선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해서 테슬라가 실제로 해내자 이를 농담이었다면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테슬라는 에디슨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후 부터 둘은 앙숙이 되었다.
1886년 에디슨을 떠나온 그는 테슬라 일렉트릭 컴퍼니를 설립했다. 투자자들과 함께 설립했지만 정작 투자자들은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보다 아크 등 직류 시스템에 더 관심과 비중을 두었기에 결국 회사는 문들 닫았다. 테슬라는 전기 기사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다 2년 후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 특허에 주목한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의 특허권을 사들이고 그를 자신의 회사에 스카우트하였다.
1893년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교류 시스템이 우위임을 증명하였고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이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에는 테슬라의 설계로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이용하여 교류 전기를 생산하고, 이를 뉴욕주 버팔로까지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현대 전력 시스템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무수한 발명품
1890년대 후반에서 1910년대 그는 무선 통신과 미래 기술에 대한 비전을 확실하게 제시했다. 그는 전력을 무선으로 전송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장거리 무선 통신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실험을 성공했다. 마르코니보다 먼저 무선 통신 원리를 발견했지만 특허 분쟁에서 뒤늦게 그의 독창성이 인정되기도 했다.
그는 세계 무선 시스템을 꿈꿨고 이를 위해 워든클리프 타워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투자자 JP모건이 수익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투자를 중단하면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미완으로 남았다.
그밖에 세계 최초의 무선 제어 보트를 개발하여 원격 제어 기술의 기초를 다졌다. 뢴트겐보다 먼저 x선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인체에 대한 x선 촬영의 위험성도 예측한 바 있다.
와든클리프 타워에 관하여(wardenclyffe tower)
와든클리프 타워는 니콜라 테슬라가 1901년 뉴욕주 롱아일랜드 쇼어햄 마을에 세운 실험적 무선 송신시설이다. 테슬라 타워라고도 불린다. 테슬라는 이 타워를 통해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까지 무선으로 전신, 전화, 화상 전송까지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 이와 동시에 전기를 무선으로 송신해 전 세계에 무료로 공급하는 것을 꿈꿨다. JP모건이 투자를 중단한 이후 1906년 테슬라는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이 타워는 1917년 테슬라의 빚을 갚기 위해 철거되어 사라졌다.

테슬라가 말하는 우주의 비밀
테슬라는 우주를 이해하는 열쇠로 에너지와 진동 그리고 주파수라고 하였다.
만약 당신이 우주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에너지, 진동, 그리고 주파수를 생각하라.
이것이 그의 우주관의 핵심이다. 그는 물질의 근원이 원자나 입자가 아니라, 특정 주파수로 진동하는 에너지라고 믿었다. 우주 만물이 각기 달느 주파수를 가지고 진동하며, 이 진동을 이해하고 조절함으로써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보았따. 그의 무선 에너지 전송, 공명 이론 등이 이런 관점에서 탄생한 거다.
테슬라는 우주가 거대한 지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이 지성에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자신의 영감은 아카식 기록과 같은 우주의 정보 저장고에서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발명이 섬광 같은 영감이나 갑작스러운 통찰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자주 말해 왔다. 이런 경험은 마치 우주로부터 정보를 다운로드하는 것 같았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우주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보와 의식이 끊임없이 교류하는 살아있는 시스템으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인간을 컴퓨터 기종 같은 것으로 인식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에테르의 존재
테슬라는 당시 물리학에서 논의되던 에테르(ether)의 존재를 믿었다. 에테르는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으며 빛과 전자기파가 전달되는 매질이라 여겼다. 테슬라는 에테르가 단순한 매질이 아닌 우주 에너지의 근원이자 모든 정보가 기록되는 공간이며, 만물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에테르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어 무한한 전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와든클리프 타워 프로젝트도 이러한 신념의 일환이었다. 현재 물리학에서는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니콜라 테슬라는 신지학과 연관이 깊어 보인다. 우주적 조화와 통일, 영적 진화, 아카식 기록에서 에테르까지 신지학에 기초하고 있다.
공명을 통한 에너지 활용
테슬라는 우주의 모든 것이 특정한 주파수로 진동하며, 이를 공명(resonance)를 통해 조절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공명 시스템이며, 특정 주파수를 통해 지구 전체에 에너지를 무선으로 전송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공명을 통해 작은 에너지로 거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결국 자유 에너지에 대한 그의 비전으로 이어졌다.
니콜라 테슬라의 말년과 죽음
테슬라는 와든클리프 프로젝트 실패 후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시대를 너무 앞섰고 상업적 성공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말년에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고 호텔방에서 비둘기와 함께 지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 강박증과 결벽증도 심해졌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이성이나 결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결혼을 하면 책임이나 감정적 유대로 자신의 발명에 방해가 될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이성에 대한 눈이 너무 높은 완벽주의였다. 그리고 그의 눈높이에 맞는 여성을 끝내 못 찾았다. 테슬라는 말년에 더욱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순결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을 정도였다.
여자보다 비둘기를 더 사랑한 테슬라
그렇다고 그가 인물이 못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았다. 테슬라 눈에 들어오는 여성이 없었을 뿐이었다. 여성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보니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스퍼거 증후군일 가능성이 높아 이성 관계형성의 어려움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확률이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여성과 교제 같은 친밀한 관계였던 적은 있었으나 테슬라가 가장 사랑한 것은 비둘기 뿐이었다. 테슬라는 비둘기들에게 엄청난 애정을 쏟았다. 특히 한마리의 흰 비둘기를 여자 사랑하듯이 사랑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래서 테슬라는 비둘기가 아플 때는 모든 정성을 다해서 돌봤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잃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발명에 대한 헌신과 완벽주의로 인한 금욕주의였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비둘기를 여자보다 더 사랑했다고.
그는 1943년 1월 7일 향년 86세에 뉴욕 맨해튼의 뉴요커 호텔 33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혼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이었고 이는 심장으로 가는 혈관에 혈전이 생겨 혈액 공급이 막히는 질환으로 흔히 심장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미국 정부 FBI는 그의 연구 자료에 발명품을 압수하였고 훗날 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실제 개발했거나 시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당국은 실효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