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괴팍한 천재 칼 라커펠트에 관하여

패션계의 괴팍한 천재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는 20세기와 21세기 초 패션계를 지배했던 독일 출신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입니다. 그의 파격적인 디자인과 확고한 스타일, 그리고 독특한 페르소나는 그를 패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칼 라커펠트의 바이오그래피

위대한 디자이너 칼 라커펠트는 1933년 9월 10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것이 그는 항상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더 어리게 말하곤 했답니다.

패션계의 천재 칼 라커펠트는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프러시아 귀족의 후예로 그의 아버지는 증류 커피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문화적 감각이 뛰어난 바이올리스트였습니다. 그런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박물관 등을 자주 가서 창조적 영감을 얻곤 하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깊었고 그리하여 파리로 이주하여 고등 교육을 마쳤습니다. 그는 1995년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서 코트 부문에서 1위로 당선되면서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대회에서 드레스 부분 1위 수상자 이브 생 로랑과도 인연이 생겼고 피에르 발망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패션계의 천재 칼 라커펠트 젊은 시절

이후 장 파투(Jean patou)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끌로에, 발렌티노, 찰스 주르당, 크리치아 등 여러 브랜드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커리어를 쌓아 갔습니다.

그는 동시에 여러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맡으며 경이로운 작업량을 소화하기로 유명했습니다. 1965년에서 2019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는 펜디의 상징이 된 더블 F 로고를 직접 디자인하였는데요. Fun Fur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fun하게 모피 혁명을 이끈 겁니다.

샤넬의 역사를 새로 쓴

칼 라커펠트는 펜디보다 샤넬 디자이너로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3년부터 2019년까지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샤넬을 부활시켰습니다. 칼은 코코의 유령과 싸우겠다고 선포하였고, 칼은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샤넬의 상징인 트위드 재킷, 진주, 퀼팅 백 등을 젊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되찾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샤넬을 최고로 끌어올린데는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가 있었습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모델로, 그녀도 샤넬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죠.

칼 라커펠트와 이네스 드 라프레상주

칼 라커펠트의 페르소나와 일화

아이코닉한 외모 소유자 칼 라커펠트는 백발의 포니테일 스타일에 흰색 하이칼라 셔츠, 블랙 선글라스에 가중 장갑을 항시 착용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상당히 거구로 육중한 체격의 소유자였으나 2002년 무려 40킬로를 감량하여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이 쪘을 때가 훨씬 풍채며 인상이 보기 좋았던 것은 사실이죠. 늙어서 살 빼면 솔직히 좋아 보이기 보다는 아파 보이니까요.

그는 살을 빼기 위한 목적이 에디 슬리먼의 슈트를 입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요. 에디 슬리먼은 2000년에서 2007년까지 디올 옴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당시 패션계를 뒤흔든 재능있는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스키니한 실루엣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소위 게이 패션으로 전락하긴 하였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칼 라커펠트는 에디 슬리먼의 쿨하고 퇴폐적인 록 스타 느낌이 나는 룩에 매료되어 스키니 붐에 동참하고 싶어 살을 뺀 거라고 합니다. 그렇게 13개월 만에 무려 40kg을 감량한 것입니다.

칼 라커펠트 다이어트 전후

으레 유명한 과학자나 창조자들이 괴팍하기 마련이듯, 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발언은 항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일화입니다.

나는 지루해지느니, 논쟁의 중심에 서겠다.

솔직함은 천재들의 기본 장착템인가 봅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 외에도 뛰어난 사진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출판사도 운영하는 등 광범위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고양이 슈페트

그는 평생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게이였다는 사실은 본인이 직접 밝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공공연한 사실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박혀 있습니다. 에디 슬리먼의 옷을 입기 위해 살을 뺀 노력을 한 것만으로 완벽한 게이를 입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개적으로 여성과 사랑을 했다거나 흔한 스캔들조차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고양이 슈페트만 있었습니다. 그의 버마 고양이 슈페트(choupette)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고양이 전담 요리사부터 보디가드, 주치의까지 두었으며 심지어 슈페트가 아이패드를 사용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칼 라커펠트가 사망 후 고양이가 유산의 일부를 물려받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슈페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중 한마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프랑스 법상 동물이 직접 상속을 받을 수 없어서 그렇지 법안만 해결되었다면 고양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슈페트

2011년 8월에 태어난 슈페트 고양이는 칼이 죽을 때 7세 6개월이었습니다. 그의 사망 후 슈페트는 그의 전 하우스키퍼였던 프랑수아즈 카코테가 돌보고 있으며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칼 라커펠트의 멧 갈라에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칼 라커펠트의 사후

칼은 2019년 2월 19일 85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췌장암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세계 패션피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나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테이블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기 전까지 컬렉션을 지휘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디자이너의 퇴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패션계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특히 샤넬은 그의 오른팔이었던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이었습니다. 그녀는 30년 이상 칼 라커펠트와 함께 일하며 샤넬의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샤넬의 전통과 코드를 존중하면서도 라커펠트의 화려함은 배제하고 좀 더 유연하고 실용적이며 젊은 감각의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샤넬 매출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2024년 6월 그녀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2025년 7월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마티유 블라지는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큰 성공을 거두며 높은 평가를 받았던 디자이너로 샤넬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을 것을 기대하고 있긴 하지만 글쎄요. 두고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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