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지나 롤로브리지다

세계 전역의 남자들을 현혹시킬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던 지나 롤로브리지다 스토리다.

지나 롤로브리지다

당대 헐리우드 최고 배우 험프리 보가트는 지나를 본 후 마릴린 먼로가 꼬마공주 셜리 템플로 보일 정도라고 했을 만큼 육감적이고 섹시한 매력이 상당했다고 전했다.

20세기의 모나리자로도 불린 그녀는 1927년 7월 4일 로마 동쪽의 가난한 산악지대인 수비아코 마을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구업자였으나 전쟁 후 가세가 기울어졌고, 2차 대전 중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지나는 조각을 전공하기 위해 로마의 미술 아카데미에 다녔다. 그녀는 학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이애나 로리스라는 예명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열광적으로 읽히던 포토 소설 ‘포토로만쪼‘의 모델로 생계를 꾸렸다.

배짱 좋은 배팅으로 시작된 배우 인생

영화 관계자의 눈에 띄게 된 그녀에게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가수라면 모를까 배우는 별로 관심이 없던 그녀는 제안한 금액보다 몇 배나 많은 금액을 달라고 요구했다.

예상외로 영화사에서 원하는 만큼 지불하겠다고 하자, 그녀는 “그렇다면 배우나 해볼까”라며 시작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되었다.

지나

성공적인 배우 입성 후 1950년 유고슬라비아 태생 의사 밀코 스코픽과 결혼했다. 남편은 의사 대신 본격적으로 지나의 매니저로 나섰고, 1957년 아들 밀코 주니어가 태어났다.

헐리우드 진출과 하워드 휴즈

그녀는 1953년 마리오 솔다티의 ‘웨이워드 와이프’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고, 같은 해 코멘치니 감독의 “빵, 사랑 그리고 꿈”과 이듬해 속편 “빵, 사랑 그리고 질투”로 큰 인기를 얻었다.

상대역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남자배우 비토리오 가스만이었다.

헐리우드 진출은 하워드 휴즈의 러브콜로 이뤄졌다. 존 휴스턴의 ‘비트 더 데빌'(1954)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네버 소 퓨'(1959)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와 공연했다.

로버트 Z. 레너드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1955)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하워드 휴즈는 그녀를 헐리우드 스타로 만들어줬지만 사심도 가득 담았다.

훗날 관계가 틀어진 후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하워드 휴즈가 끊임없이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강요했다고 했다.

하워드 휴즈가 죽고 난 후 공개한 말이니 믿거나 말거나가 되었다.

지나 롤로브리지다 커플

캐나다 이주와 이혼

1960년 부부는 스코픽 형의 후원을 받아 토론토 로즈데일로 이주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란 비난을 받았지만 부부는 부인했고, 3년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이혼이 합법이 된 1971년, 지나는 첫 수혜자가 되었다.

17년의 결혼 생활을 합법적으로 청산하면서 “결혼은 지루하고 거의 항상 장례식장과 같고 부부는 종종 서로를 너무 많이 구속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들 부부에 국한한 얘기인지 결혼 제도의 불편함을 얘기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채로운 연애사와 인간관계

이혼 후 보다 자유로운 여성이 된 지나를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한 모나코의 레니에 3세가 노골적으로 몇 년동안 쫓아다녔다고 한다. 결혼 생활 중이던 1961년과 1965년 당대 최고 스타 록 허드슨과 함께 영화를 찍으며 사이가 각별했다.

훗날 그가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로 판명났지만 그녀는 “그가 게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바뀔 수 있다. 둘이 러브씬을 찍을 때 그는 평범한 남자였고 나를 매우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녀가 2006년 79세의 나이에 34살 연하남과 결혼 의사를 밝혔는데, 언론에 알려지자 “언론 보도가 끝없는 공격, 비방, 폭력으로 인생을 망쳤다”며 결혼을 취소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결혼이 성사됐고 2019년 무효 처리됐다.

그녀 말로는 자신과 닮은 여자를 내세워 혼인 서약을 했다는 건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결혼은 무효 처리됐다. 훗날 지나는 “그와는 사랑이 아닌 열정이었고, 나는 항상 젊은 남자들에게 약한 구석이 있다”고 덧붙였다.

관종과 트러블 메이커

지나는 뛰어난 매력과 연기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수많은 소송을 하고 다닌 관종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심지어 뉴욕 레스토랑에서 음식의 딱딱한 물체가 이를 썩게 했다며 소송을 걸어 72,000달러를 받아내기도 했다.

진상 오브 진상이었다.

비슷한 매력으로 승부한 소피아 로렌과는 50년동안 앙숙으로 지냈다.

2015년 베니티 페어에서 “소피아 로렌과 그녀의 언론 대리인들이 나와 ‘경쟁’을 시작했고, 50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만능 아티스트

언론의 남다른 관심과 관종의 재능도 있었지만 지나는 실제로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아티스트였다.

자신의 매력적인 모래시계형 몸매(35-22-36)를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해서 입었고, 말년에는 화가와 조각가로서도 재능을 보여줬다.

배우 생활 이후에는 사진에 매력을 느껴 사진가로 활동했다.

카메라를 들고 구소련에서 호주까지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1974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초청으로 12일간 쿠바에 머물며 독점 인터뷰를 진행해 화제가 됐다.

그녀는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 관찰되는 것보다 재밌고, 다른 사람을 찾음으로써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고 말했다.

노래도 잘 불렀다. 어쩌면 배우보다 조각가보다 가수로서 재능이 더 충만했을 정도였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디바 리나 카발리에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영화에서 미모와 연기력뿐만 아니라 노래도 대역 없이 전곡을 직접 불렀을 정도다.

정치 도전과 말년

1999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1%의 득표를 얻었다. 비록 낮은 득표율이지만 그녀의 열정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21세기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자신의 독특한 의상 일부가 지나 롤로브리지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외로운 자유인의 마지막

그녀에게는 수많은 남자들이 구애했지만 정작 자신은 외톨이였다고 말했다.

“살면서 어떤 타협도 한 적이 없고 독립적이며 항상 혼자였다. 나의 힘의 원천은 자유로운 영혼에 있었고, 위대한 상상력이 힘과 활력을 주었다”고 했다.

말년에는 조각가들과 함께 일했던 토스카나의 피에트라산타에 여름 집을 지키며 첫사랑인 조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나 롤로브리다는 2023년 1월 16일 95세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 자신을 위해 고생한 집사에게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남기겠다는 유언장을 썼고, 이를 둘러싸고 아들, 손자와 법적 다툼을 벌였다. 그녀는 “나는 평화롭게 살고 죽을 권리가 있다”고 흐느끼며 말하고 세상을 떠났다.

평생 으르렁거리며 악담을 일삼던 소피아 로렌은 그녀의 별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으며 깊이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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