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속 오딘
1. 태초의 살해와 창조의 모순

북유럽 신화 속 오딘 그 시작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존속 살해와 피비린내 나는 도륙으로 시작된다.
태초의 공허인 ‘긴눙가가프’의 적막을 견디지 못한 오딘은 형제들과 결탁하여 거인족의 시조이자 세상의 주인인 ‘이미르’를 살해한다. 이 잔혹한 살해의 동기는 생존이 아닌, 무료함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오딘은 이미르의 살과 뼈를 찢어 대지와 산맥을 만들고, 피로 바다를 채웠다.
그가 만든 인간(아스크와 엠블라)은 통나무를 깎아 만든 피조물에 불과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딘이 저지른 ‘원죄’의 결과물이며, 그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거인의 시체라는 그로테스크한 진실이 깔려 있다.
이 창조 설화는 오딘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핏줄도, 도덕도 짓밟을 수 있는 냉혹한 실용주의자임을 시사한다.
2. 상실을 통한 획득: 미미르의 샘과 외눈의 의미
창조주가 된 북유럽 신화 속 오딘 그를 움직인 것은 안주가 아닌 끝없는 ‘결핍’이었다.
그는 운명의 샘(우르드), 질투의 샘(흐베르겔미르)을 지나 지혜의 샘인 ‘미미르의 샘’으로 향한다. 이곳을 관장하는 미미르는 오딘이 죽인 이미르의 혈족(외삼촌 격)으로 알려져 있다.
조상을 죽인 원수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리 만무했으나, 미미르는 거래를 제안한다.
“지혜를 원한다면 너의 한쪽 눈을 바쳐라.”
오딘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눈을 도려내 샘물에 던진다.
이것은 단순한 신체 훼손이 아니다. 육신의 눈(물리적 시각)을 포기함으로써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심안(통찰력)을 얻겠다는 등가교환이다.
두 눈으로 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된 그는,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공포까지 감지하게 된다.
3. 샤먼으로서의 오딘: 자기 희생과 룬의 발견
오딘의 지적 탐욕은 죽음 너머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에 거꾸로 매달려, 자신의 창 궁니르로 옆구리를 찌른 채 9일 밤낮을 식음을 전폐한다. 이는 북유럽의 샤머니즘적 입문 의식을 상징한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법의 문자인 ‘룬(Rune)’을 터득한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신비한 힘을 얻어낸 이 사건은 그를 단순한 전사가 아닌 ‘마법사 왕’으로 격상시킨다. (참고로 수요일을 뜻하는 Wednesday는 오딘의 고대 이름인 Woden에서 유래했다.
이는 그가 일상의 시간 속에 깊이 뿌리박힌 존재임을 보여준다.)
4. 통제와 감시의 아키텍처
지혜와 마법을 손에 넣은 오딘은 철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한다.
- 후긴(생각)과 무닌(기억): 두 마리의 까마귀는 전 세계를 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이는 오딘이 자신의 지각 능력을 외부로 확장시켰음을 의미한다.
- 게리(탐욕)와 프레키(굶주림): 그의 발치에 있는 두 늑대는 오딘의 내면적 본성을 대변한다. 그는 자신의 식량을 이들에게 던져주며 포식자의 본능을 곁에 둔다.
- 흘리드스캴프: 이 의자에 앉으면 9개의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판옵티콘(원형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완벽한 감시 체계다.
여기에 던지면 반드시 명중하는 창 ‘궁니르’, 9일마다 8개의 황금 팔찌를 복제해내는 ‘드라우프니르’는 무력과 경제력마저 독점한 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로키가 암말로 변신해 낳은,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는 그에게 차원을 넘나드는 기동성까지 부여했다.
(슬레이프니르의 어원은 ‘미끄러지다(Slippery)’와 닿아 있으며, 이는 경계를 허물고 질주하는 속성을 내포한다.)
5. 모든 것을 가졌으나 미래만은 가질 수 없었던 신
오딘은 지식, 마법, 부, 명예, 그리고 무력까지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이 모든 ‘스펙 쌓기’의 종착점은 허무하게도 불안이었다.
그는 예언된 종말,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시기와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가 발할라에 전사들을 모으는(속칭 ‘줍줍’하는) 행위는 다가올 파멸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다.
거대한 부와 지혜를 쌓아 올리고도, 결국 내분의 씨앗과 외부의 위협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오딘의 모습. 이는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을 혹사시키지만, 정작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신조차 운명 앞에서는 한낱 고뇌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6.오딘의 초상
북유럽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신화의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은 신 오딘의 초상은 결코 영광스럽지 않다.
황금으로 치장된 권좌 대신 그를 설명하는 것은 낡은 회색 망토와 깊게 눌러쓴 모자, 그리고 그 아래 감추어진 텅 빈 눈구멍이다.
우리는 흔히 신을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지만, 오딘의 삶의 궤적은 오히려 결핍과 불안으로 점철된 한 편의 비극적인 인간 드라마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를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저지른 이 존속 살해는 그가 만든 세상의 기반이 피와 살육 위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창조주라는 거창한 이름 이면에는 원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오딘을 가장 오딘답게 만드는 것은 지혜를 향한 그의 광적인 집착이다.
그는 운명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주저 없이 도려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입체적인 세상을 포기한 대신, 그는 보이지 않는 이면을 꿰뚫어 보는 심안을 얻었다.
6.1. 지혜는 우울과 예민함으로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두 눈으로 볼 때보다 더 많은 진실을 보게 된 그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파멸의 징후까지 목격하게 된다. 지혜는 그에게 평안 대신 깊은 우울과 예민함을 선사했다.
그의 고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가지에 스스로 목을 매달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아흐레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이 기이하고도 고통스러운 자기 희생의 의식을 통해 그는 마법의 문자인 룬을 손에 넣는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비로소 우주의 비의가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한 전사의 신을 넘어, 샤먼적인 고뇌를 짊어진 구도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혜와 마법을 손에 넣은 오딘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통제하려 든다.
그의 양 어깨에 앉은 까마귀 후긴과 무닌은 매일 아침 세상으로 날아가 모든 소식을 물어오고, 그의 발치에 있는 늑대들은 탐욕과 굶주림을 상징하며 주인의 불안한 내면을 대변한다.
아홉 세계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의자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그는 편집증적인 감시자가 되어 다가올 위협을 경계한다. 던지면 반드시 명중하는 창 궁니르와 끝없이 황금을 만들어내는 팔찌 드라우프니르를 가졌음에도, 그의 영혼은 단 한 순간도 안식을 취하지 못한다.
6.2. 오딘의 발버둥
결국 오딘의 모든 발버둥은 예정된 종말, 라그나로크를 향한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늑대에게 잡아먹혀 생을 마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발할라에 용맹한 전사들의 영혼을 끊임없이 모으는 그 필사적인 노력조차, 정해진 운명의 수레바퀴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딘의 신화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승리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신이라는 탈을 쓴 가장 비극적이고도 인간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파멸을 알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는 그 외눈의 시선은, 어쩌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불안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