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읽는 우물 이야기

우물 이야기

수천 년의 시간 차를 두고 인류는 언제나 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고대 근동의 우물과 현대 도심의 스타벅스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인다.

한쪽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물을 얻는 척박한 노동의 현장이고, 다른 한쪽은 잉여 자본을 태워 카페인을 섭취하는 여가의 공간이다.

우물

그러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두 공간을 해부하면, 그 본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으면서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기이하게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두 곳 모두 인간을 끌어당기는 ‘액체로 된 중력’이 작용하는 제3의 공간이다.

1.정보의 허브이자 접속의 플랫폼 우물 이야기

우물 이야기 가장 큰 공통점은 두 공간이 ‘정보의 허브’이자 ‘접속의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고대 성읍의 우물가는 오늘날의 초고속 와이파이 구역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다.

여행자들은 우물에서 먼지의 무게와 함께 타국의 소식을 내려놓았고,

주민들은 물을 긷는 행위를 핑계 삼아 마을의 스캔들과 정치적 동향을 교환했다.

현대인이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전 세계의 뉴스를 검색하거나 SNS로 타인과 접속하는 행위는, 리브가가 우물가에서 낯선 여행자 엘리에셀과 정보를 교환하던 행위의 디지털 버전이다.

두 공간 모두 집(사적 공간)과 일터(공적 공간) 사이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이 잠시 닻을 내리는 정박지로서 기능한다.

특히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 비서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찾아 나선 것은 마치 80년대 한국의 부유층에서 볼 수 있는 선시장을 보는 듯하다.

고대의 우물과 80년대의 호텔 로비는 당대 최고의 자본과 정보, 그리고 가문의 명예가 충돌하는 럭셔리한 탐색전의 무대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엘리에셀과 리브가의 만남을 그 시절 서울 강남이나 명동의 특급 호텔 커피숍 풍경에 빗대어 분석한다.

1.1.탁자 위의 그랜저 열쇠와 우물가의 금코걸이: 맞선의 고고학

1980년대 대한민국 중산층 이상의 결혼 풍속도에서 호텔 커피숍은 단순한 기호 식품 소비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기 전, 서로의 재력과 교양을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1차 검증소였다.

푹신한 소파, 정중한 웨이터, 그리고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맞선의 격조를 높이는 장치였다.

창세기 24장의 우물가 역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정확히 이와 같은 위상을 차지한다.

아브라함의 대리인 엘리에셀이 낙타 열 필을 끌고 나타난 장면은, 80년대 재력가의 대리인이 최고급 세단인 그랜저나 벤츠 10대를 호텔 로비 입구에 줄지어 주차해 놓은 것과 같은 시각적 충격 효과를 갖는다.

이는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상대방을 압도하는 자본의 시위(Demonstration)다.

1.2. 엘리에셀의 포지션

이 장면에서 엘리에셀의 포지션은 신랑 당사자가 아닌, 재벌 회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비서실장 혹은 베테랑 중매쟁이(속칭 마담뚜)에 해당한다.

그의 임무는 회장의 아들(이삭)에게 걸맞은 며느릿감을 현지에서 발굴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80년대 맞선 자리에 당사자보다 부모나 주선자가 먼저 나와 상대방을 관찰하듯, 엘리에셀은 우물가라는 오픈된 공간에 자리를 잡고 후보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가 목이 마르다며 물을 청하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욕구 해결이 아니다. 이것은 맞선 자리에서 차를 따르는 예절이나 어른을 대하는 태도를 보겠다는, 짐짓 무심한 척 던지는 테스트 문항이다.

1.3. 완벽한 신붓감

리브가의 행동은 이 테스트에 대한 모범 답안이었다.

그녀가 엘리에셀에게 물을 주고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준 것은, 80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맞선 주선자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춤은 물론이고, 주선자가 데려온 수행원이나 기사들의 식사까지 살뜰히 챙기는 세련된 처세술이다.

고대의 며느리에게 요구된 덕목이 강인한 체력과 노동력이었다면, 80년대 며느리에게 요구된 것은 현모양처로서의 교양과 배려심이었다.

우물 이야기의 주인공 리브가는 우물가라는 공개 무대에서 자신이 거대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질(Physicality & Mentality)이 충분함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엘리에셀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주목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면접관이 채점표에 만점을 기입하며 흡족해하는 순간의 정적과도 같다.

1.4. 일종의 착수금

우물 이야기 낭만 보다는 비지니스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엘리에셀이 금 코걸이와 손목고리를 꺼내 리브가에게 채워주는 장면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계약금 지불과 같다.

80년대 맞선 시장에서도 상대가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명품 스카프나 가방 같은 고가의 선물이 오가며 애프터를 기약했다.

흥미로운 점은 엘리에셀이 선물을 먼저 주고 나서야 네가 누구의 딸이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이는 외모와 태도, 능력이 이미 검증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서류 전형(집안 배경) 뿐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리브가가 자신의 족보를 밝히고 유숙할 곳(재력)을 어필하는 순간, 이 맞선은 성공적인 인수합병(M&A) 단계로 진입한다.

1.5. 선시장의 작동 원리는 같다

결국 창세기의 우물가나 80년대의 호텔 커피숍이나,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결혼은 개인의 로맨스가 아니라 가문의 결합이며,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자본의 증명과 까다로운 행동 면접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냉혹한 사회적 합의다.

리브가는 우물이라는 고대의 쇼케이스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엘리에셀이라는 노련한 헤드헌터에게 스카우트되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리무진(낙타)에 오르게 된다.

시대와 배경만 바뀌었을 뿐, 조건을 따지고 등급을 매기는 인간의 혼인 시장 메커니즘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놀랍도록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

2.접속의 결이 다른 장소

우물 이야기 속 고대의 우물은 선시장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의 우물은 ‘불가피한 대면’의 장소였다. 물을 긷는 순서를 정하기 위해, 혹은 무거운 돌 뚜껑을 열기 위해 타인과의 협력이나 말싸움은 필수적이었다.

그곳은 소음과 땀 냄새, 그리고 가축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날것의 광장이었다.

반면 현대의 카페는 ‘군중 속의 고립’을 파는 곳이다.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있지만, 이어폰과 스크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서로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현대의 우물가인 카페에서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배경음(White Noise)으로 소비할 뿐, 그들과 섞이지 않는다. 고대의 우물이 공동체의 생존을 확인하는 결속의 장이었다면, 현대의 카페는 개별화된 원자(Atom)들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승역이다.

3.신화적 상상력과 자본주의적 욕망의 치환

신화적 상상력과 자본주의적 욕망의 치환도 흥미롭다.

고대 신화 속 우물 이야기 그 속에는 종종 ‘지혜’나 ‘생명’, 혹은 ‘신탁’이 솟아나는 성소(Sanctuary)로 묘사되었다.

물은 신의 선물이었기에 그곳에는 제단이 세워졌고 맹세가 이루어졌다. 현대 사회에서 이 신성성은 ‘브랜드’와 ‘각성’으로 치환되었다.

현대인은 아침마다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는 의식을 통해 노동을 위한 각성을 얻는다.

우리는 스타벅스의 사이렌 로고 아래서 맹세를 하지는 않지만, 세련된 취향과 구매력을 과시하며 자본주의적 소속감을 확인한다. 과거의 우물지기가 부족의 질서를 관장하는 족장이나 제사장이었다면, 현대의 우물지기는 복잡한 레시피를 집전하는 바리스타다.

3.1. 비용의 개념도 다르다

결정적으로 ‘비용’의 개념이 다르다. 고대의 우물물은 화폐로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대가는 오직 노동(물 긷기)이나 피(전쟁), 혹은 부족 간의 동맹이었다.

다윗이 마시고 싶어 했던 베들레헴 우물물은 돈이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으로 지불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카페는 철저히 화폐 교환의 논리로 작동한다.

우리는 노동하지 않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쾌적한 공간과 음료를 ‘점유’할 권리를 얻는다. 고대의 우물이 생존을 위한 투쟁의 공간이었다면, 현대의 카페는 생존의 투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도피처다.

결국 고대의 우물과 현대의 카페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갈증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그것은 목구멍을 적시는 물리적 갈증인 동시에, 타인과 연결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사회적 갈증이다. 양 가죽 텐트 밖의 우물에서든, 통유리창 너머의 카페에서든, 인간은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관찰하며, 액체를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형태는 돌에서 콘크리트로, 두레박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바뀌었지만, 우물가에 모여드는 인간의 본능은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살리는 물과 죽이는 물: 생존의 좌표와 피의 칵테일

우물 이야기 속 우물이 언제나 사교와 비즈니스의 화려한 무대였던 것은 아니다.

조명이 꺼진 무대 뒤편, 극한의 상황에서 우물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얼굴을 드러낸다.

하나는 사회로부터 축출당한 자가 부여잡은 생존의 동아줄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 권력자의 허영심이 빚어낸 피의 칵테일이다.

성경 텍스트는 하갈과 다윗이라는 대조적인 인물을 통해 우물이 가진 이 극단적인 이중성을 가감 없이 폭로한다.

4.1.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마주한 물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마주한 광야의 우물은 사회적 타살의 현장에서 발견한 유일한 비상구였다.

그녀는 주인의 학대와 질투에 밀려 물 한 가죽부대를 들고 쫓겨난, 성서 역사상 최초의 난민이자 싱글맘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은 바닥났고, 자식의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통곡뿐이었다.

이때 발견한 우물은 만남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끊어지기 직전의 생명줄을 잇는 응급실의 산소호흡기와 같았다.

그녀가 신에게 붙인 이름 ‘엘 로이(El Roi, 나를 살피시는 이)’는 종교적 찬양이라기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투명 인간 같은 자신을 누군가 ‘보고 있다’는 실존적 안도감의 표현이었다.

하갈에게 우물은 문명 세계가 버린 찌꺼기들을 받아주는 자연의 거친 자비였다.

4.2. 다윗의 죽이는 물

반면 다윗의 베들레헴 우물 에피소드는 권력의 무료함이 어떻게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지 보여주는 서늘한 심리 스릴러다.

블레셋 적진에 포위된 산성에서 다윗은 고향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갈증이 아니었다.

늙고 지친 영웅이 과거의 영광과 평화롭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내뱉은, 지독한 향수(Nostalgia) 섞인 투정이었다.

문제는 이 감상적인 혼잣말이 충성 경쟁에 눈먼 부하들에게는 목숨을 건 특수 작전 명령으로 하달되었다는 점이다.

세 명의 용사는 왕의 기호식품을 구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칼춤을 추며 물을 길어왔다.

다윗이 받아 든 물잔은 H2O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하들이 흘린 피와 아드레날린이 뒤섞인, 세상에서 가장 비싼 액체였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는 행위가 곧 부하들의 생명을 씹어 삼키는 식인(Cannibalism)과 다름없음을 깨닫고 전율한다.

그는 결국 물을 마시지 못하고 땅에 쏟아버린다.

이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자신의 말 한마디가 가진 폭력적인 무게에 대한 참회이자 신에게 바치는 속죄의 제사였다.

하갈의 물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찾아낸 ‘생명의 좌표’였다면, 다윗의 물은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 강탈해 온 ‘죽음의 전리품’이었다.

우물은 이렇게 누구에게는 살 길이 되고, 누구에게는 씻을 수 없는 피 냄새를 남기며 인간 욕망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5. 한국 설화 속 등장하는 우물에 관하여

인류 보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우물의 원형(Archetype)은 깊고 어두운 구멍이다.

그러나 그 구멍을 바라보는 문화적 시선은 지역과 풍토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분석한 성경 속 우물이 광야의 생존 투쟁과 사회적 욕망이 교차하는 수평적 ‘광장(Plaza)’이었다면, 한국 설화에 등장하는 우물은 하늘과 땅, 혹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수직적 ‘통로(Portal)’이자 신성한 ‘자궁(Womb)’이다.

스타벅스처럼 붐비는 사교의 장이 아니라, 신비와 공포가 서린 금단의 구역에 가깝다.

5.1. 건국 신화 속 우물

한국 신화, 특히 건국 신화에서 우물은 왕권의 기원과 직결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서 발견된 알에서 태어났고, 김알지 역시 ‘시림’ 숲 속 우물가에서 탄생 설화가 시작된다.

여기서 우물은 식수원이 아니다. 그것은 땅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위대한 존재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거대한 산도(Birth Canal)다. 성경의 우물이 며느리를 구해 가문을 잇는 ‘결혼 시장’이라면, 한국의 우물은 왕조 자체를 생산해내는 ‘신성한 인큐베이터’다.

성경의 인물들이 우물가에서 “누구의 딸이냐”를 물으며 인간적인 조건을 따질 때, 한국의 고대인들은 우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초월적 존재의 강림을 경배했다.

이것은 우물을 생활의 공간이 아닌 제의(Ritual)의 공간으로 격상시킨다.

5.2. 우물가 로맨스

물론 한국 설화에도 성경과 유사한 ‘우물가 로맨스’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버들잎 설화다.

목마른 장수가 물을 청하자 처녀가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며 급히 마시지 못하게 했다는 이 이야기는 리브가의 낙타 물주기 테스트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여성이 물을 매개로 남성의 상태를 살피고 배려하는 지혜를 검증받는 과정이다.

그러나 뉘앙스는 다르다. 리브가의 행동이 1톤의 물을 길어 나르는 ‘압도적인 노동력과 활력’의 과시였다면, 장화왕후의 버들잎은 ‘속도의 조절’과 ‘정성’을 보여주는 은유적 퍼포먼스다.

서양의 우물가가 효율과 자본(낙타)이 오가는 비즈니스 미팅 룸이라면, 한국의 우물가는 은근한 정서와 미학이 흐르는 다실(Tea Room)에 비견된다.

5.3. 우물의 남다른 깊이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우물의 깊이, 즉 ‘심연’을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사무엘하 17장의 마른 우물은 첩보원들이 숨을 수 있는 물리적인 지하 벙커였다.

그러나 한국 설화에서 우물 속은 물리적 깊이를 넘어선 이세계(Otherworld)로의 입구다.

수많은 설화에서 주인공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 용궁(Undersea Palace)에 도달하거나, 도술을 부리는 이인을 만난다.

이는 우물을 지표면의 구멍이 아닌, 차원을 이동하는 ‘워프 게이트(Warp Gate)’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5.4. 공포의 근원

동시에 이 깊이는 공포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국의 민담에서 우물은 한(Resentment)을 품고 죽은 귀신이 거주하는 음습한 공간이다.

서양의 우물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수이거나 권력 다툼의 현장이라면, 한국의 우물은 마을의 공동체적 트라우마나 억울한 죽음이 봉인된 장소다.

비 오는 날 우물에서 기어 나오는 귀신의 이미지는, 우물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가장 취약한 지점임을 암시한다.

성경의 우물이 소란스러운 대낮의 공간이라면, 한국의 우물은 안개 낀 새벽이나 달빛 비치는 밤의 공간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설화 속 우물은 ‘수직의 상상력’이 지배한다.

그곳은 땅 밑의 용왕과 땅 위의 인간, 그리고 하늘의 신성이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다. 성경의 우물이 현대의 ‘스타벅스’나 ‘증권 거래소’처럼 인간들의 수평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플랫폼이라면, 한국의 우물은 왕이 태어나는 ‘신전’이자 귀신이 출몰하는 ‘흉가’, 그리고 용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결합된 판타지적 공간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우물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곳이 아니라, 함부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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