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스타일 연대기

이브 생 로랑의 스타일 연대기

이브 생 로랑이 남긴 족적을 단순히 패션의 변천사로 읽는 것은 순진한 접근이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룩(Look)들은 당대 여성들이 욕망했던 사회적 지위와 감추고 싶은 결핍을 정확히 포착한 결과물이다.

그는 옷을 판 것이 아니라, 입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환각’을 팔았다. 이것은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인간의 속물성을 자극해 온 정교한 미적 사기극의 기록이다.

1. 1958. 트라페즈 라인: 허리를 지운 불안한 해방

이브 생 로랑 스타일 연대기 트라페즈 라인

이브 생 로랑의 스타일 연대기 중 디올의 그늘 아래서 그가 처음 내민 카드는 트라페즈 라인(Trapeze Line)이다. 어깨는 좁고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지는 이 실루엣을 두고 평론가들은 여성의 신체를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이것은 교묘한 은폐술이다. 허리 라인을 지워버림으로써 여성은 자신의 관능을 미숙한 소녀의 이미지 뒤로 숨길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라기보다, 성숙한 여성으로서 받아야 할 시선과 책임을 유예하고 싶은 불안한 욕망이 투영된 결과다.

1.2.1960s. 베티 카트루 & 룰루 드 라 팔레즈: 영혼의 쌍둥이와 보헤미안 광대

생 로랑의 초기 시절, 그의 곁에는 항상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이브 생 로랑 스타일 연대기 중 룰루 드 라 팔레즈

베티 카트루(Betty Catroux)는 생 로랑이 자신을 ‘여자 형제’라고 부를 만큼 집착했던 존재다. 깡마른 몸매와 긴 금발, 그리고 중성적인 마스크를 가진 그녀는 생 로랑의 내면에 잠재된 여성성을 시각화한 육체였다.

그녀가 입은 남성적인 재킷과 바지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별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디자이너의 나르시시즘적 투영이었다. 반면 룰루 드 라 팔레즈(Loulou de la Falaise)는 우울한 생 로랑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야 했던 화려한 광대였다.

그녀의 보헤미안 스타일과 과장된 액세서리는 생 로랑의 컬렉션에 생기를 더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디자이너의 고갈된 상상력을 채워주는 연료로 소진되었다.

2.1965. 몬드리안 룩: 여성을 납작한 캔버스로 박제하다

이브 생 로랑 스타일 연대기 몬드리안 룩

몬드리안 룩()은 예술을 입는다는 지적 허영심을 가장 완벽하게 충족시킨 상품이다.

피에트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원피스에 옮겨 놓음으로써, 그는 입체적인 여성의 몸을 평면적인 캔버스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이 옷을 입으며 자신이 현대 미술을 향유하는 교양인이라 착각했지만, 실상은 명화를 흉내 낸 비싼 포장지를 두른 것에 불과했다.

움직이는 인간을 정지된 오브제로 격하하면서도 박수를 받아낸 기이한 승리의 순간이다.

3.1966. 르 스모킹: 밤의 거리를 배회하는 남장 여자의 갑옷

르 스모킹

생 로랑의 커리어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르 스모킹(Le Smoking)이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턱시도를 여성에게 입힌 이 사건은 페미니즘적 혁명으로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옷의 본질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동경이다. 가늘고 긴 실루엣, 날카로운 라펠은 여성이 남성의 언어를 빌려와야만 비로소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시대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당당함이 아니라, 밤의 포식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차려입은 위장복이자 갑옷이었다.

4.1967. 카트린 드뇌브: 이중적인 부르주아의 초상

영화 세브린 느(Belle de Jour)에서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가 입은 의상은 생 로랑 스타일의 정점인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브 생 로랑 스타일 연대기 벨데주르

겉으로는 차갑고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피학적인 성적 욕망을 감춘 여주인공에게, 생 로랑의 재단만큼 잘 어울리는 껍데기는 없었다.

딱 떨어지는 코트와 단정한 원피스는 그녀의 타락을 감추는 완벽한 포장지였다.

드뇌브는 이후로도 생 로랑의 가장 충실한 고객이자 친구로 남았지만, 이는 서로가 가진 ‘차가운 우아함’이라는 가면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5.1968. 사파리 룩: 도시 정글을 위한 식민지적 판타지

사파리 룩(Safari Look)은 제국주의적 향수를 가장 세련되게 다듬은 결과물이다.

이브 생 로랑 스타일 연대기 사파리룩

수렵용 재킷과 흙빛 컬러를 도시 한복판으로 가져온 이 스타일은, 노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부르주아들이 야생의 거친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끈으로 허리를 조이는 재킷을 입고 그들은 사냥꾼 흉내를 냈지만, 그들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타인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즐기는 모험,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루한 형태의 낭만이다.

6.1968. 시스루 룩: 관음증을 해방으로 포장한 기만

시스루룩

속살이 비치는 소재를 사용한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은 성적 금기를 깨트린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얇은 오간자 블라우스 아래로 드러난 신체는 주체적인 노출이라기보다, 관음증적인 시선에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잘 보이게 진열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을 뿐이다.

‘자신감’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이 노출증은 결국 보는 자의 쾌락을 위한 봉사였다.

7.1970s. 낸 켐프너: 식당 입구에서 바지를 벗은 사교계의 여왕

뉴욕 사교계의 명사 낸 켐프너(Nan Kempner)의 일화는 생 로랑의 옷이 가진 권력과 오만을 상징한다. 고급 레스토랑 ‘라 코트 바스크’에서 여성이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바지를 벗어버리고 튜닉 상의만을 원피스처럼 입은 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를 통쾌한 일화로 소비하지만, 실상은 “나는 옷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계급”이라는 것을 과시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녀가 입었던 생 로랑의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조차 조롱할 수 있는 특권층의 면허증이었다.

8.1971. 비앙카 재거: 반항을 가장한 최상위 포식자의 결혼

비앙카 재거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와 결혼식을 올리던 날, 비앙카 재거(Bianca Jagger)는 웨딩드레스 대신 생 로랑의 하얀색 르 스모킹 재킷을 입었다.

셔츠도 입지 않은 채 재킷만 걸친 그녀의 모습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대중은 이를 록 스타의 아내다운 저항 정신이라 칭송했지만, 냉소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가장 계산된 관심 끌기였다. 관습을 거부한다고 외치면서도 결국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옷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기득권이 ‘반항’이라는 코드를 악세사리처럼 소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9.1976. 러시안 룩: 빈곤을 가장 비싼 값에 소비하는 방식

러시안룩

그의 후기 걸작이라 불리는 러시안 룩(Russian Look) 혹은 ‘리치 페전트(Rich Peasant)’ 룩은 아이러니의 극치다.

러시아 농민들의 투박한 의상을 화려한 금실과 값비싼 벨벳으로 재해석한 이 컬렉션은, 가난마저도 부자들의 유희 거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진짜 빈곤은 냄새나고 추하지만, 생 로랑이 만진 빈곤은 낭만적이고 호사스러웠다.

상류층 고객들은 이 비싼 코스튬을 입고 혁명 전 러시아의 귀족이 된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현실의 고통을 거세하고 껍데기만 취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패션이 가진 잔인한 속성이다.

10. 2020s. 로제: 자본주의가 빚어낸 현대의 인형

현대로 넘어와 생 로랑의 앰버서더가 된 블랙핑크의 로제(Rosé)는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미학이 21세기에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보여준다.

극도로 마른 몸매와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생 로랑이 평생 동안 집착했던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아름다움’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 미니 드레스와 킬힐은 K-팝 아이돌이라는 상품성과 명품 브랜드의 배타성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대중은 그녀를 동경하지만, 그녀는 생 로랑이라는 거대한 자본 시스템이 선택한 가장 완벽하고 매끄러운 마네킹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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