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의 시작과 종교 역사에 관한 모든 것

1.강의 특혜를 받은 이집트 문명의 시작

기원전 3100년경 나르메르라는 파라오가 상·하이집트를 최초로 통일하면서 이집트 문명이 시작되었다. 상이집트는 나일강 상류인 이집트 남쪽 지방이며, 하이집트는 북쪽에 위치한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방이다.

나르메르는 상하이집트 경계인 멤피스에 통일 이집트의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집트 3000년 왕조 시대는 세 차례의 왕국 시대와 그 사이의 세 번의 중간기, 그리고 말기 시대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로 구분된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하피(HAPY)라는 신으로 신격화시켜 숭배하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일어나는 나일강의 범람은 다른 강과는 다르게 항상 예측이 가능한 범위에서 일어났다. 주변 경작지에 매년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생겨 이집트인들은 큰 노력 없이도 양질의 곡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런 규칙적인 리듬이 이집트인들의 시간 관념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날짜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1.1.고왕국 피라미드 시대

이집트 문명의 시작과 피라미드

고왕국 시대는 피라미드 시대라고 불린다. 이집트 제3왕조부터 6왕조까지의 재위 기간이며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의 힘이 강화된 시기이다. 왕의 위치가 신격으로 격상되어 초기에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그리고 이집트 제5왕조부터는 태양신 레의 아들로 숭배되었다.

1.2.이집트 문명의 고전기 중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는 기원전 2040년부터 기원전 1782년까지의 기간으로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가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집트 문명의 고전기라고 칭할 정도로 문화예술이 융성한 시기였다. 특히 세바이트, 즉 교훈 문학의 발전이 중왕국 시대의 지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파라오만이 누릴 수 있던 사후 영생이 일반 귀족들에게도 확대되었고 이는 장례 예술과 문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이 쳐들어 오면서 끝을 맞았고 힉소스인들은 나일강 하류 대부분을 정복하고 아바리스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1.3.파라오가 등장하는 신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는 1550년부터 1070년까지 지속된다.  힉소스를 축출한 아흐모세1세가 제18왕조를 개창하면서 시작되었고 수도를 멤피스에서 테베로 옮긴다. 국력의 정점을 찍으며 전세계와 교역을 하였고 남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레반트까지 진출하며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신왕국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로세 3세, 아케나켄과 그의 아내인 네페르티티, 소년왕 투탕카멘, 이집트 최고 명군인 람세스 2세 등이 모두 이 시대의 파라오들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세계의 첫 유일 신앙인 아텐 신앙이 등장했다.

신왕국 시대 중요 특징 중 하나는 피라미드 대신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조성한 것이다. 왕들의 계곡은 물론 왕비들의 계곡은 세계적 유적이자 유명 관광지로 남아있다.

1.4.동네북 시기 말기 시대

말기 시대는 열강의 침략을 받은 동네북 시기였다. 25왕조의 경우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에서 시작된 왕조라 파라오들은 흑인이었다. 26왕조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권이며, 27왕조는 페르시아 왕을 파라오로 모시는 왕조가 성립되었다. 30왕조 말기에는 페르시아가 다시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때 페르시아 정권은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너졌다. 그의 사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그리스계 왕조를 세웠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는 이집트의 파라오였지만 순수한 이집트인이 아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

2.상하로 구분된 이집트 문명 특징

이집트의 달력은 세 계절로 이루어졌다.

  1. 아케트(Akhet) – 나일강이 범람하는 홍수의 계절 (6월~9월)
  2. 페레트(Peret) – 범람했던 나일강 물이 다 빠지면서 토지가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되고, 비옥해진 토지에 농부들이 씨를 뿌리며 이 씨앗들이 자라는 생장의 계절 (10월~1월)
  3. 셰무(Shemu) – 태양신 ‘라’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난 작물들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계절 (2월~5월)

2.1. 지리적 구분

  • 상이집트의 나일강: 룩소르 지역
  • 하이집트의 나일강: 카이로 지역
  • 나일강 하구: 로제타 지역

고대 이집트 문명은 상·하이집트로 구분된 검은땅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붉은땅과 투쟁해 온 30세기 동안의 드라마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외에 중요한 지리적 구분이 존재한다. 이는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과 그 사막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나일강이 만들어놓은 자연경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지역을 검은땅(kemet)이라 부르며 추앙하였다. 검은땅 너머에 있는 황량한 붉은땅(deshret)은 죽음과 동일시하며 파괴와 혼돈의 신인 세트(seth)의 땅으로 믿었다.

2.2. 상·하 이집트의 상징

  • 상이집트: 하얀색 왕관, 독수리, 연꽃, 사초풀
  • 하이집트: 붉은색 왕관, 코브라, 파피루스, 꿀벌

3. 파라오와 왕명의 기록

파라오는 절대군주라기보다는 우주의 정의(마아트, maat)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일종의 공무수행자였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대단히 역동적이었지만 보수적 성향의 문명이기도 하였다. 파라오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항상 특별한 틀 안에 써놓았다. 이름을 담는 틀에는 세레크와 카르투쉬 두 종류가 있었다.

3.1. 세레크(Serekh)

세레크(serekh)라 불리는 네모난 틀은 ‘알려지게 하라’는 뜻이다. 틀의 상단부에는 파라오가 갖고 있던 종교적·정치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동물의 상징이 자리한다. 보통은 호루스(horus)신을 의미하는 매나 세트(seth)를 상징하는 네발 동물이 한 마리씩 새겨지는데 두 마리가 동시에 새겨지는 사례도 있다.

3.2. 카르투쉬(Cartouche)

고왕국 시대 3왕조 말이 되면 카르투쉬(cartouche)라고 불리는 밧줄로 만들어진 타원형의 새로운 틀이 등장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투탕카멘이나 람세스 2세, 클레오파트라 7세 같은 파라오의 이름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등의 이름도 이 카르투쉬 안에 씌여져 있다.

4.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처음부터 뚝딱 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한 것이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30년부터 2611년까지 지어진 파라오 조세르의 피라미드로 알려졌다.

고대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미르, 모르, 모레, 모르, 마리 )등으로 불렀다. 이는 ‘올라간다’라는 뜻이다.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의 피라미드와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는 일반 피라미드와는 달리 예르(yr)라고 불렸다. 예르는 사다리 혹은 계단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대체로 피라미드는 개별적 명칭이 있었다.

제4왕조 스네프루 왕은 피라미드 건축 기술을 크게 발전시킨 왕으로 굴절 피라미드붉은 피라미드를 축조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로 카이로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쿠푸의 대피라미드, 카프레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등이 있다.

피라미드는 고대 미스테리한 유물임이 분명하지만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은 수천 명에서 10만 명까지 동원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을 노예가 아닌 휴농기의 농부들을 위애 대체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이집트판 뉴딜정책이었다는 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1. 사카라의 피라미드

사카라에는 총 12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약 4600년 전에 세워진 역사상 최초의 피라미드다. 또한 세계 최초의 석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조세르는 3왕조 시대의 두 번째 파라오다.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설계자는 임호텝이다. 이는 고왕국 시대 최고의 현자이자 대신관, 의사, 박학다식한 대학자이며 위대한 행정가였다. 후대에는 신격화되어 많은 추종 및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4.2. 그밖에 다양한 형태의 피라미드

다슈르는 역사상 세워진 모든 피라미드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모양의 피라미드를 만날 수 있다. 그 이름은 굴절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완벽한 완전체 피라미드는 파라오 쿠프의 대피라미드이다.

카이로 도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자(Giza)는 카이로 광역권에 속하는 카이로의 위성도시이다. 기자에 피라미드가 세워진 시대는 피라미드 건설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였다. 매장실 벽면에 파라오가 사후세계에서 부활하여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는 마법의 주문들, 소위 피라미드 텍스트라 불리는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 5왕조 시대의 파라오인 우나스의 피라미드는 ‘우나스의 아름다운 땅’이라 불렸다.

5. 이집트 주요 인물과 지역들

5.1. 이집트 고고학자 마리에트의 업적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1821년 프랑스의 불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집트 미이라에 매료되어 이집트학을 공부했다. 그는 독학으로 고대 이집트어와 콥트어를 공부하였고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일자리를 구했다. 1850년 박물관은 마리에트에게 콥트어 필사본 파피루스 수집이라는 임무를 받고 카이로로 향했다.

콥트 장로회에게 필사본을 하나 건네받을 양으로 카이로에서 지내고 있던 마리에트는 석회암으로 만든 스핑크스가 카이로의 골동품 시장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유물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부자들에게 소장용으로 금세 팔려나갔다. 마리에트는 유물들의 출처를 알아보다 그것들이 한 이탈리아 상인을 통해서 시장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상인을 추궁한 끝에 그는 스핑크스들이 사카라에 있는 고대 멤피스의 공동묘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정보를 들었다.

마리에트는 카이로를 떠나 사카라로 향했다. 마침내 그는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북쪽에서 땅 위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스핑크스의 머리를 발견하였고 그것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의 암시장에서 본 스핑크스와 같은 모양이라는 걸 알았다. 마리에트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아피스의 현현으로 믿어지던 신성한 황소를 매장해온 세라피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쌓여온 흙과 모래를 치우기 위해 당장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을 고용하여 발굴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에게 지급한 파피루스 구입 비용을 사용했지만 워낙 놀라운 성과를 낸 까닭에 박물관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세라피움 발굴을 통해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아주 대중적이고 오랫동안 유지되던 아피스 신앙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고, 함께 발견된 수백 개의 비문들을 통해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편년체계를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발견으로 그는 이집트학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집트 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5.2. 룩소르 (테베)

이집트 최대의 관광지 룩소르이다. 연구자들은 그리스 식으로 테베라고 부르기도 한다. 룩소르는 고대 이집트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왕국 시대 이집트에서 가장 번성하던 도시다.

룩소르 도심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있는 거대한 신전 카르나크 신전이며 이페트 이수트 신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가장 완벽한 곳’이란 뜻을 지닌 곳이다.

5.3. 데이르 엘 메디나

고대의 데이르 엘 메디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파 데미(pa demi) 혹은 진리의 장소라는 의미의 타 세트 마아트(ta set maat)라고 불렸다. 이 진리의 장소는 500년 동안 파라오의 무덤을 만드는데 종사하던 건축가, 석공, 목수, 금속 세공사 등 전문 장인들이 대를 이어서 모여살던 마을이다.

5.4.필라에 섬

필라에 섬은 마법의 섬이라 불린다. 이곳에 건설된 신전이 신화 속 가장 유명한 여신이자 유능한 마법사이던 이시스 여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6. 이집트 주요 파라오들

6.1. 람세스 2세

기원전 1279~1213년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제 3대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명이다. 사랑도 뜨겁게 하던 정열적인 남성이었다. 100여 명에 이르는 아들들 및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네페르타리와 이시스-네페르트인데, 이 두 왕비에게서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낳았다. 무려 66년 2개월 똥안 이집트 신왕국을 통치했다.

6.2. 람세스 3세

람세스 3세는 이집트가 더 이상 세계 제1의 강대국이 아니게 된 시대에 태어나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파라오이다.

6.3.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이집트 최고의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이다. 재위 기간 21년으로 가장 긴 통치 기간 동안 매우 성공적인 치세를 한 인물로 알려졌다. 뛰어난 외교와 무역 성과는 물론 건축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았다. 역사는 그녀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여성으로 평가하고 있다. 유일한 여성 파라오를 뛰어 넘어 최초의 최고의 성공적인 파라오를 의미했다.

6.4. 종교 개혁으로 유명한 아케나텐

제 18왕조의 파라오 아케나텐은 투탕카멘의 아버지이다. 룩소르 신전을 폐쇄했던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고대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네페르티티의 남편이었다는 사실도 유명세에 한몫했다.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인물 아케나텐은 다신교 영향 아래의 이집트 전통을 바꾸려 하였다. 그는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로지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며 세계 최초의 유일신교를 탄생시켰다. 그가 선택한 신은 태양 원반의 신인 아텐이었다. 아텐은 이집트인들이 그때까지 숭배하던 신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태양은 매일같이 동쪽에서 떠올랐고 그 태양의 빛은 온 세상을 항상 축복했기 때문에 아텐은 굳이 의인화되어 상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파라오와 고위직 사제만이 신전 깊숙한 곳에서 신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직접 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변치 않던 전통의 무게를 딛고 일어난 아케나텐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여 ‘최초의 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개성은 고대 이집트 전통의 관점에서 골칫거리였다. 모든 백성이 직접 신을 대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무척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득권을 위협하는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케나텐은 도시를 건설하여 수도를 천도하는 계획에 이른다. 아텐의 지평선이란 뜻의 아케타텐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그곳은 오늘날의 알 아마르나 지역에 해당한다.

그의 새로운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파라오와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 사회 상류층 일부였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종교개혁이나 천도뿐 아니라 예술 작품에도 드러났는데, 석상들의 모습을 기이한 체형으로 만들어놓았다. 가늘고 기다란 상체에 축 처진 엉덩이, 길쭉하게 늘어난 얼굴 등 외계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상을 만들었다.

6.5. 투탕카멘

아케나텐은 재위 1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투탕카멘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10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아케나텐 재위시절 중신이던 아이(ay)와 호렘헵(horemheb)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실권을 장악한 그들은 잠시 엇나갔던 전통을 회복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수도가 다시 룩소르로 돌아가고 신전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투탕카멘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그때 총리이던 아이(ay)가 먼저 왕위를 이었고, 이어 군인 출신의 호렘헵이 스스로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7. 이집트 문명의 종교와 신앙

7.1. 영혼관: 바(Ba)와 카(Ka)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의 영혼이 바(ba)카(ka)로 나뉜다고 믿었다. 바(Ba)는 사람의 머리를 갖고 있는 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영(soul)의 개념과 같다. 사람의 머리를 갖고 있는 새의 모습은 이집트 곳곳 벽화에서 볼 수 있다. 바는 사람들 개인의 인격과 관련이 깊은데 그렇기 때문에 바는 사람들의 외모를 결정한다. 바는 원래 저 세상에 속한 것으로 여겼기에 사람이 사망할 경우 사라져 버리지는 않지만 육신과는 분리되어 새의 모습으로 햇빛을 거슬러 하늘로 오른다고 믿었다. 즉, 사람이 죽으면 바는 육신과는 분리된다고 믿었다. 파라오나 귀족들의 무덤에서 벽화로 자주 그려져 있는 ‘입을 여는 의식’은 바로 임종시 육신에서 분리된 바가 천상으로 오를 수 있게 하는 의식이다.

카(Ka)는 보통 혼(spirit) 혹은 혼의 본질이라고 번역된다. 카는 바와 달리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사망 후에도 육신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이 죽게 되면 카는 일단 육신에서 분리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분리일 뿐, 카는 훗날 다시 육신을 찾아오게 된다. 이게 바로 부활이다. 이집트인들이 공을 들여 미이라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망자에게 끊임없이 음식을 제물로 바치고 생명력을 제공하기 위해 물품을 무덤에 넣어둔 것이다. 육신과 혼이 모두 온전하게 유지되어야 사후 세계에서도 부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7.2.순례객들의 아버지 아부 엘 학가

순례객들의 아버지란 의미의 아부 엘 학가는 룩소르에 이슬람교를 포교하며 이슬람의 성자로 추앙받는 이름이다. 그는 1174년 이라크의 모술에서 태어났다. 출생과 혈통은 샤리프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의미했다. 소년 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상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40대가 된 후에는 꿈과 열정을 가지고 이집트로 건너와 이슬람을 진지하게 공부한 후에 룩소르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했다. 현재도 룩소르에서는 매년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아부 엘 학가는 고대 이집트와 이슬람 문명이 만나는 상징적 인물로 룩소르의 종교적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8.영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들

8.1.파라오의 왕관

이집트의 왕관은 5종류이다. 지역에 따라 상이집트의 왕은 큰 원추형에 끝이 뾰족하게 높이 올라간 흰색 왕관을 썼으며, 하이집트 왕은 머리 윗부분이 납작하고 귀가 길게 솟은 붉은색 왕관을 썼다. 기원전 3000년경 상이집트의 나르메르왕에 의해 통일된 이후로 파라오는 두 왕관을 한꺼번에 씀으로 통일 왕국을 통치하는 힘을 상징하였다. 이밖에도 전투에서 사용되는 푸른 왕관과 종교적 제례에서 사용하는 아테프(atef)가 있다.

8.2. 육면체상

이집트인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 조각 등을 무덤이나 신전에 비치함으로써 영생을 믿었다. 여러 형태의 조각상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육면체상이다. 육면체로 만들어진 몸통부분은 죽은 이의 이름, 직함, 공적 또는 영생을 비는 기원문 등을 새겨 넣거나 특별한 의도의 부분 조각을 첨가할 수 있는 면을 제공해 주고 있다.

8.3. 가짜문

장례 때 제사의식을 집행하는 방에 세워졌던 것으로 죽은 자의 영혼 카(ka)가 이리로 드나들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다음 세상에서 사는데 필요한 제물이나 기도를 받아들이는 마술적인 기능을 했던 장치이다. 고왕국시대 무덤의 가장 깊은 곳에 비석처럼 세워져 있다. 문 위에는 창문 모양을 만들어 죽은 자의 모습을, 문에는 죽은 자가 마치 저승에서 막 나오려는 듯한 모습을 새겨 넣었다.

8.4. 샤브티

‘대답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죽은 자의 시중을 들기 위해 무덤에 같이 넣었던 사람 모양의 노예 인형이다. 사람 모양을 작게 만들어 장례때 시신과 함께 부장하는 관습은 중왕국시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여자 모습은 없고 대부분 남자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죽은 사람의 성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하고나 같이 묻혀 다음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8.5.안크 십자가

고대 이집트의 상징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오브제이다. 상형문자로 생명, 살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이 기호는 T자 위에 타원형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으로 삶과 관련된 모든 의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신전에 봉헌할 조각이 완성되면 최후로 사제가 안크를 조각의 코에 대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과 여신의 손에는 항상 안크가 쥐어져 있다. 후에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십자가)로 변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8.6. 쇠똥구리 장식

이집트인은 태양을 거대한 쇠똥구리가 굴리고 다니는 원반이라 여겼으며 쇠똥구리를 통해 생명의 원천을 상징했다. 또한 쇠똥구리의 번식방법에서 탄생과 새로운 생명, 더 나아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쇠똥구리는 삶을 상징하는 색인 파란색, 녹색의 재료로 주로 만들어졌다. 이로써 저승의 심판에서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에 대비해 죽은 자의 가슴에 쇠똥구리 장식을 매달거나 부착함으로써 죽은 자가 반드시 영생하도록 하였다.

8.7.미이라 손가락, 발가락 싸개

미이라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죽은 자가 손과 발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시체를 썩지 않고 그대로 마르도록 처리하는 과정에서 손가락 마디, 발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균이 침입하기 쉬운 신체의 끝부분이 부패하지 않기 위해 중왕국시대부터 손가락, 발가락 싸개를 만들어 각별히 보호하였다.

8.8. 관

사람이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관속에 눕혔다. 이 관은 맹수나 무덤 도굴꾼으로부터 미라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엇보다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집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였으나 중왕국시대에 이르면서는 미라와 같은 사람 모양의 형태가 등장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몇겹으로 관을 만들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도금을 하거나 보석으로 치장을 하는 등 화려한 관이 만들어졌다.

8.9.카노푸스 단지

죽은 자를 미이라로 만들 때 꺼낸 내장을 보호하는 용기이다. 간, 허파, 위, 창자를 담는 네 개의 단지로 이루어진다. 그 재질은 석회암, 알라바스터, 도기, 나무 등으로 용기의 뚜껑 부분에도 여러 가지 세공을 하였다. 이 단지들은 미이라의 관 옆에 매장되었다.

8.10.사자의 서

약 200개의 주문들로 이루어진 장례문서로 기원전 16세기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파피루스에 기록된 사자의 서는 관속에 넣거나 미이라를 감싸고 있는 천속에 끼워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소위 ‘부인하는 고백’, 즉 살아 생전에 이러이러한 나쁜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고백의 내용은 42명의 신들에 대하여 차례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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