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데카당스의 원조 에디 세즈윅
시대가 만든 아이콘, 혹은 시대에 버려진 소녀 에디 세즈윅에 붙여진 수식어는 적지 않다. 가난한 부잣집 딸, 앤디 워홀의 팩토리 문화, 유명해지는 것 자체로 유명해진 최초의 셀럽이다.
에디 세즈윅은 28세의 한창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비극적인 삶은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가려진 6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다.
1960년대는 해방과 혼란의 이중주였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청춘은 자유를 외쳤고, 팝아트는 예술의 민중화를 선도하며 ‘쿨함’이 하나의 정치가 되었다. 그 중심에서 누구보다도 짧고 강렬하게 타올랐던 인물이 있다 바로 에디9 세즈윅(Edie Sedgwick)이 그랬다.
그녀는 단지 앤디 워홀의 뮤즈였던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청춘의 분열과 광기의 정수를 체현한 실존이었다.
1. 부유하지만 불행한, 아메리칸 데카당스의 원조 에디 세즈윅 출생기
부유한 가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단 한 번도 가난을 겪지 않았지만, 내면은 늘 굶주려 있었다.
팬츠리스 룩의 창시자이자 ‘잇 걸(It girl)’의 원형으로 불리는 에디 세즈윅.

하지만 그녀는 외로움과 결핍의 기호였으며 단지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거울로서 찬란하게 부서진 존재이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0일,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의 대목장에서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난 에디는 미국 건국 공신들의 후손이었다.
조상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했고, 대학을 창설했으며, 미국 정신의 주춧돌을 놓은 엘리트 혈통이었다.
그러나 그 후손에게 내려진 유산은 명예가 아닌 병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으나 철도 재벌이 되려던 꿈이 좌절되고 정신건강 문제로 신경쇠약 진단을 받은 조각가였다.
어머니는 극심한 대인기피증 환자였으며, 남편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다. 의사들은 이 부부에게 아이를 낳지 말 것을 권했으나, 그들은 15년 동안 8명의 아이를 낳고 말았다.
이들은 광활한 목장 안에 사립학교를 짓고, 아버지가 직접 짜놓은 커리큘럼대로 아이들을 교육했다.
외부와 단절된 방식이었기에, 자녀들은 세상과 쉽게 융화되지 못했고 그들만의 기이한 감각 속에 갇혀 자랐다.
1.1. 불안정한 정신 건강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의 에디 세즈윅은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이 열악했다. 명망있는 가문의 화려한 삶 속에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불안정한 정신 건강이 정서적 결핍을 가져다 주었다.
부모는 아이들을 낳는 데만 집중했고,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에게 맡겼다. 특히 에디는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뒤 폭행까지 경험했다.
가족 내 정신질환은 유전되었고, 둘째 오빠 프랜시스는 10대부터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었다.
그는 자신이 게이임을 아버지에게 고백한 후 1964년 26세 생일 직전 병원 화장실에서 자살했다.
18개월 후, 정신건강 문제가 있던 큰 오빠도 오토바이 사고로 31세에 사망했다.
에디는 13세에 샌프란시스코 근처 브랜든 기숙학교에 입학했으나, 에디는 거식증으로 1958년에 자퇴했다.
상태가 악화된 에디는 1962년 실버 힐 병원에 입원했다가 허술한 규율 속에서 외출을 반복하며 병동을 떠돌았다. 치료 후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했고, 하버드 대학생과의 짧은 만남 후 임신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낙태했다.
1963년 말, 그녀는 매사추세츠 캠브릿지로 이사해 사촌과 미술 공부를 했고 여러 파티에 참석하며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다.
2. 뉴욕과 앤디 워홀: 무대와 착취의 공존

1964년, 에디는 뉴욕으로 건너가 발레와 미술을 배우며 사교계에 입문했다.
그곳에서 파티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그 누구보다 스타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불편한 바지 대신 불투명한 검은 스타킹이나 망사 스타킹만을 입은 채 춤을 추던 파격적인 팬츠리스 룩은 단순한 의상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의 선언이었다.
“꼭 바지를 입어야 하나요? 레깅스로 대체할 수도 있잖아요.”
이 말은 마치 요즘 세대들이 항변하는 대사 같기도 하다.
래드클리프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지적이고 아름다운 에디는 1965년 3월, 당시 팝 아트 운동의 대표주자였던 앤디 워홀을 만났다.
‘더 팩토리’라는 예술 살롱에서 워홀은 에디를 영화 ‘말'(1965)과 ‘비닐'(1965)에 출연시키며 “팩토리의 여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에디는 워홀의 ‘팩토리’ 아트그룹의 공식 일원으로서 총 18편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미국의 ‘잇 걸’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워홀은 그녀의 리얼하고 파괴적인 사생활을 콘텐츠화했지만 금전적 보상은 없었다. 에디는 주목받았지만 소진되었다.
3. 에디 세즈윅의 사랑과 마약 사이
이 시기 에디는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뉴욕의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워홀의 요청으로 그녀를 팜므파탈로 그린 ‘팜므파탈’이란 노래를 작곡할 정도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에디는 워홀의 곁에서 빛났지만 점차 망가져갔다.
동시에 그녀는 밥 딜런의 로드 매니저였던 밥 뉴워스와 관계를 맺었고, 밥 딜런과도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1966년 밥 딜런이 사라 로운즈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워홀이 전해주면서 에디는 또 하나의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자신이 단순히 작품만을 위한 피사체라고 느낀 에디는 결국 앤디를 떠났고,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졌다.
워홀은 자신을 떠난 그녀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으로 대중적으로 그녀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동성애자로 알려진 워홀의 인생에서 에디는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술과 마약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마약 중독으로 재활시설을 전전하던 에디는 1971년 8살 연하의 마이클 포스트와 결혼하며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4. 에디 세즈윅의 예견된 죽음과 손금
1971년 11월 16일,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패션쇼 파티에서 누군가 그녀를 헤로인 중독자라고 몰아붙여 쫓기듯 집으로 돌아왔다. 파티장에 있던 손금 보는 사람이 그녀의 끊어진 생명선을 보고 놀라자, 에디는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알고 있었어요.”
그날 밤 의사가 처방한 진통제와 최면제를 과다 복용한 채 잠에 들었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바르비투르산염 중독이었으며,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5. 유행, 병리, 예술 사이에서
에디 세즈윅의 삶은 단순한 요절 스타의 비극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녀는 유행을 만든 인물이었고,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자기 표현적이었다. 부모의 병리, 가족의 죽음, 대중의 욕망, 예술가의 착취 사이에서 그녀는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그녀는 섹스와 마약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자유를 체현한 아이콘이었다. 보수적인 미국 상류층의 혐오 대상이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살아있는 캔버스였고, 젊은이들에겐 환상이자 현실이었다.
아티스트들에게 그녀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유전과 무관심, 사랑 없는 양육, 정신병력, 사회의 욕망과 소비 구조에 의해 무너진 소녀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자유로웠으며, 당대의 패션과 감각을 선도한 선구자였다.
강렬하고 짧은 생을 살았던 에디 세즈윅은 앤디 워홀에게 가장 중요했던 뮤즈였으며, 그녀의 유산은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6. 찬란하게 빛났지만 누군가의 그림자였던 에디
에디 세즈윅은 아름다웠고 유행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타인의 도구로 사용된 삶이었다.
그녀는 팝아트의 뮤즈였고, 히피 문화의 예언자였으며, 부서진 미국 가정의 초상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되지 못한 채, 늘 무대에서만 살아야 했던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원한 ‘잇 걸’로서의 에디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병리의 희생자로서의 에디다.
두 방식 모두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삶은 단지 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다. 에디는 단지 ‘비운의 스타’가 아니다. 그녀는 1960년대의 정신이 낳은 거울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의 뮤즈인가? 아니면 혹시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