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과 엔메두란키는 죽음을 초월한 자들로 유명하다. 에녹은 성경 속 인물로 엔메두란키는 수메르 신화 속 인물로 고대 근동 문명이 꿈꾼 불멸의 중개자들이다.
1.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는 자
성경이 기록된 이후 수천 년이 흘렀지만,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녹이라는 인물은 여전히 신학자들과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창세기 5장 21절에 따르면, 에녹은 365년을 살다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피해간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에녹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지 않고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2.엔메두란키, 신들의 지식을 전수받은 왕
흥미롭게도 성경의 에녹과 유사한 인물이 더 오래된 수메르 신화에 등장한다. 바로 엔메두란키다. 기원전 2천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로,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시파르의 왕이었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시파르의 수호신 샤마슈는 엔메두란키에게 신성한 지식을 전수했다. 그는 신전 건축과 각종 의식을 관장했으며, 점술·예언·치유의 능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마치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일부 학자들 중에선 엔메두란키를 후대 바빌로니아 아카드 지식 전통의 신화적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3.에녹과 엔메두란키 이름에 담긴 의미

3.1.엔메두란키의 이름 의미
엔메두란키의 이름은 ‘마구간의 주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가축을 돌보며 백성들의 생계에도 직접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실용적인 지혜와 신성한 능력을 모두 갖춘 이상적 지도자상이었던 셈이다. 마구간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명령을 보존하는 주인 혹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운명의 기록자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EN-ME=DUR-AN-KI에서 DUR이 수메르어로 거처 혹은 보존 공간을 뜻하기에 이런 저런 해석이 담긴 듯하다. 일부 신학자들은 신성한 지식이 동물과 함께 있는 공간, 즉 야생과 문명의 경계를 마구간으로 해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흥미롭게도 예수는 마구간에서 탄생했다. 로마 제국 시대 유대 땅의 가장 낮고 천한 공간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 태어났다는 역설로 보이는데 엔메두란키는 점성술의 전달자로 여겨졌고, 예수의 탄생은 점성가들에 속하는 동방박사들에 의해 발견된 점도 인상적이다.
3.2. 에녹의 이름과 의미
에녹의 이름은 ‘시작’ 또는 ‘시초’를 의미한다. 이는 그가 새로운 차원의 존재, 즉 인간과 신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의 시작점이었음을 암시한다. 시작이란 의미를 지닌 에녹을 하나님은 왜 데려가신 걸까? 에녹은 성경에서 예외적으로 죽은 것이 아닌 사라진 것으로 막을 내렸다. 예수 조차도 죽음을 경험했는데 에녹 만큼은 죽음을 초월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 였을까?
유대 신비주의에서 에녹은 메타트론으로 불린다. 가장 인간적인 신 혹은 신의 인간적 얼굴이다. 그는 신의 음성과 율법을 대언하는 천상의 서기관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의 에녹은 이드리스로 지혜와 기록의 사람, 그리고 옷을 처음 만든자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옷을 처음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에녹이 아니었을까? 싶은 상상도 해본다.
4.두 인물의 공통점과 차이점
4.1.에녹과 엔메두란키의 공통점
둘은 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고 죽음없이 천상으로 승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신을 잇는 중개자 역할로 기억되고 있다. 둘 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로 엔메두란키는 신의 명령을 받아 인간 사회의 제사장 계급을 설정하는 중간자로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에녹은 창세기와 에녹서에 따르면 신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자로 기록된다. 하지만 정황상 에녹은 엔메두란키를 차용한 인물로 보인다.
4.2. 에녹과 엔메두란키의 차이점
에녹은 365년을 살다가 사라졌지만 엔메두란키는 자그마치 21,000년간 살았다. 그러면서도 엔메두란키는 죽지 않고 승천했다. 그는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현실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동시에 가진 지도자였다. 에녹은 보다 신비롭고 초월적인 존재로, 세속적 권력보다는 영적 차원의 완성을 이룬 인물로 본다.
5.고대 근동의 불멸 사상
이 두 인물의 존재는 고대 근동 지역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불멸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고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에녹의 경우, 한국의 전통 사상으로 표현하면 ‘도인’이나 ‘신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예언 능력을 넘어서서 신성한 깨달음을 얻고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6.현대적 의미
에녹과 엔메두란키의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지혜와 영성의 완성,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수명 연장과 불멸에 대한 꿈이 현실적 목표가 되어가는 현대에, 이 고대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신화를 넘어서 인류의 영원한 꿈을 보여주는 원형적 서사로 읽힌다.
에녹과 엔메두란키, 이 두 불멸의 존재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영원한 염원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