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신은 시스템 설계자란 확신이 읽을수록 강하게 든다.
특히 AI 시대가 되니 더욱 성경 속 창세기를 읽어보길 추천하게 된다.
1.창세기 1장 공허의 공간의 시작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떠오른 개인적인 해석과 상상들을 정리해본다. 종교적 경외감보다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마치 SF 소설을 읽듯이 성경 서사를 바라보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주가 세상을 어떻게 창조했는지에 관한 시스템 정비 매뉴얼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성경의 시작이자 핵심이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암흑의 무질서한 세계에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이 매우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1.1. heaven과 heavens
창세기 첫 장에 heaven과 heavens가 구분되어 쓰이고 있는 걸 보니 공간 개념이 달라 보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떤 하늘에 계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earth도 단순한 땅이 아닌 하나의 행성 그러니까 지구의 개념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하나님이 위와 아래를 구분한 후 본 것은 공허의 공간이었다. 북유럽 신화에도 나오는 그 공허란 의미의 긴눙가가프와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2절은 어둠으로 덮인 공허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맴돌면서 어떻게 만들까 고민한 순간이었다고 상상해본다.

2.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고 그것을 빛과 어둠으로 분리하고 빛을 낮이라고 하고 어둠을 밤이라 하고 저녁이 되고 낮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한다.
2절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형태도, 질서도 없는 원초적 상태다.
특히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는 구절은 창조의 신비로운 시작점을 암시한다.
이는 마치 예술가가 빈 캔버스 앞에서 영감을 기다리는 순간과도 같아 보인다.
3절부터 5절에 이르는 빛의 창조는 질서 부여의 첫 단계다.
빛과 어둠의 분리, 그리고 이들에게 ‘낮’과 ‘밤’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혼돈에서 질서로 향하는 창조 서사의 핵심이다.
첫째 날의 창조는 이렇게 시간의 구조를 확립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3. 둘째 날, 궁창을 만들다
신이 둘째 날 한 일은 넓은 공간을 만들어 둘로 나누고 물과 물을 갈라놓게 한 일이다.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고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게 하니 궁창을 하늘이라 불렀다.
혹자들은 둘째 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아마도 혼령 및 불가사의한 존재 혹은 악귀, 혹은 만들다 실패한 기형 제품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3.1. 궁창의 의미
6절에 등장하는 ‘궁창(expanse)’은 고대 히브리 우주관의 중요한 요소다. 이 용어는 영어로 ‘expanse’ 또는 ‘firmament’로 번역된다.
넓게 펼쳐진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창조주는 물과 물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한다. 이는 하늘과도 구분된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늘 위에 물이 있고 이것이 비의 원천이 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궁창”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성경에서의 궁창은 오히려 웅장하고 질서 있는 천체의 영역을 가리킨다.
참고로시궁창은 한국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속어이다. 더럽고 지저분한 오물이 고인 하수구를 의미한다. 여기서 시(屎)는 똥, 분변을 의미한다. 이것이 궁창과 결합하여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성경의 궁창은 한자도 다르기에 현재 시점에서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떤 웅덩이를 연상하면 다르게 파생되었을 뿐이지 태초는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4.셋째 날, 건조한 땅과 식물의 등장
9절과 10절에서 창조주는 하늘 아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여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한다.
여기서 ‘earth’는 현대적 의미의 ‘지구’라기보다는 ‘마른 땅’ 또는 ‘육지’를 의미한다. ‘dry land(건조한 땅)’라는 표현이 먼저 쓰인 후에 이를 ‘earth’라고 명명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마찬가지로 ‘seas’라는 복수형은 단일한 바다가 아닌 지구상의 여러 바다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인들이 인식했던 지구 표면의 구조를 반영하며, 창조 과정에서 육지와 바다라는 공간적 질서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1. 창세기 1장 9절
창세기 1장 9절은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의 물을 한 곳에 모아 건조한 땅이 보이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물 가운데 공간이 생기고 그 안에 하나의 지구가 생긴 모양새다.
인류의 시작은 건조한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창세기 1장 10절이다.
창조주는 메마른 땅을 지구 즉 Earth라고 하였고 물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을 바다 Seas라고 불렀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
바다를 의미하는 Sea가 아닌 복수형으로 Seas라고 쓴 것으로 보아 아직 휘몰아치는 물결, 파도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아직 구체화된 바다가 아닌 단순한 물들의 모임에 불과한 추상적인 물살로 보는 거다.
4.2. 식물이 생장하게 명령하다
창세기 1장 11절 땅에 새싹과 초목, 수확할 수 있는 씨앗을 명했다.
열매를 맺는 과일 나무 등 종류대로 땅 위에 나게 하였다.
위로 솟아나는 씨앗과 아래로 떨어지는 과일을 구분한 치밀함이 엿보인다. 이것이 훗날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마치 도마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구성하듯이 마른 땅 위에 종류별로 대령하라고 명령한 것은 일종의 요리 전 단계의 셋팅 과정이 연상된다.
4.2.1.수평과 수직
공허한 공간을 수평으로 나누고 수직으로 분리하였다.
씨를 내는 것부터 씨를 만드는 식물을 내는 과정이 일종의 계절별로 적합한 식물을 골고루 세팅한 과정으로 보인다.

이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뭔가 계속 생산해내는 시스템이 창세기 첫 장의 핵심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종을 집합시키고 그것들에게 번식을 명하게 하였다. 대체 그 많은 종들은 어디서 났으며 어떻게 수집이 가능했길래 그리 체계적으로 정리가 가능했던 걸까.
그래서 신의 눈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그 시스템을 좋아한 것이지 결실을 보고 좋아한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한번 만들어 놓으면 그들이 알아서 시스템대로 작동하게끔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창조론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5.넷째 날, 빛과 어둠의 세분화
창세기 1장 4절은 빛과 어둠의 구분이 있었다.
즉 빛에서 어둠을 분리하였는데, 14절에 가면 빛과 어둠에서 보다 세분된 낮과 밤이 구분 지어진다.
4절은 하나님이 빛에서 어둠을 분리한 거시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으며 14절은 보다 미시적으로 구체적인 빛의 구분이 있다.
별자리나 계절 순환하는 행성 주기를 정리한 과정이었다. 즉, 별자리, 일, 해 등을 일종의 표식 혹은 시간의 표시를 구분 지은 거다.
어둠과 밤의 정의 또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5.1. 칠흑 같은 어둠이란
칠흑 같은 어둠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어둠은 칠흑 그 자체다. 그러나 밤은 그렇지 않다. 밤에는 불빛이 존재한다.
달이 뜨거나 별이 뜨거나 어떤 발광체로 밝힐 수 있다. 그래서 어둠과 밤은 엄연히 다르다.
성경은 창조주가 어디에서, 어떤 관점으로 천지창조를 수행했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현대 독자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창조주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시했을까, 아니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창조의 설계도를 그렸을까? 하는 것 말이다.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창조주는 피조물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다.
따라서 그가 특정한 물리적 위치에서 창조 행위를 했다고 상정하는 것 자체가 창조주의 본질에 대한 제한적 이해일 수 있다.
6. 다섯째 날, 큰 바다 생물의 등장
창세기 1장 16절에서 20절은 넷째 날 해와 달을 만들었고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떼를 번성하게 하였다.
여기서 큰 바다 생물은 거대한 바다 고래라는 말도 있고 악어란 말도 있고 용이란 말도 있다.
그냥 바다에 사는 생물 정도로 묘사했어도 될 것을 굳이 거대한 바다 생물이라고 표현하니 의구심이 든다.
북유럽 신화에는 로키의 자식 중 한놈인 요르문간드를 바다에 던다.
이후 엄청나게 거대하게 자라 바다의 둘레를 요르문간드가 감싸고 있다고도 하니 분명 바다 속에는 거대한 생물체가 있어 보인다.
진짜로 요르문간드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또 하게 된다.
6.1. 생물과 생명체
20절에는 생물이 나오고 21절에는 생명체가 나온다.
특히 21절에는 거대한 바다 생물과 그밖의 생물 그리고 생명체를 구분한다.
그러니까 거대한 바다 생물 이외는 물고기나 새와 비슷한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의미하는 거다.
여기에는 미생물, 곤충 등 숨 쉬는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한 후 식물을 번성하게 한 후 최초로 거대한 바다 생물을 만들고 후에 인간을 만들었다는 게 되지 않을까?
7. 여섯째 날, 동물과 인간의 창조
식물을 종자별로 구축시킨 것처럼 동물도 가축과 짐승을 분류해서 대령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축과 짐승을 미리 구분 지었던 것인지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순해서 길들이기 쉬운 동물과 야생에서 살기 적합한 짐승들의 혈통 구분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살금살금 기는 것들부터 길들이기 쉬운 것들과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난폭한 것들 구분하지 않고 번식력이 있는 종족은 다 대령한 것으로 보인다.
7.1. 이분법으로 구분한 세상
24절은 동물을 종류에 따라 집합시키고 25절은 종류에 따라 만든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항상 창조주는 항상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세상을 꾸며왔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0과 1로만 구성한 이진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인간이 AI가 맞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빛과 어둠, 육지와 바다, 새싹과 초목, 씨와 열매, 물고기와 새, 그러니 동물도 동물로만 뭉뚱그릴 순 없다.
그리고 살살기는 동물은 아마도 파충류 즉 후에 등장하는 뱀을 암시하는 거겠지.
다시 생각해 보니 식물 집합 때도 이후 번성을 명해서 잘 자라게 한 것이 일종의 토너먼트가 아니었나 싶다.
“여기서 살아봐 그리고 번식도 하고”라고 명했는데 잘 자라면 창조주가 만족하는 것이다. 동물 생태계도 그랬다.
일단 어디서 불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온갖것들 다 집합시키고 번식하고 적응하게 명해서 쓰임에 맞게 잘 크고 적응하는 동물들만 살아남게 되는 거다.
7.1.1. 보기에 좋은 것
그 과정을 만들었다고 표현한 게 아닐까? 또한, 그 과정을 지켜 보면서 “보기에 좋았다”고 표현한 것이었나?
여기서 개인의 상상력을 더해보자면 신은 지구 같은 행성을 수십 수백개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첫 구절에 신은 물 위를 맴돌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인간과는 다른 영역의, 그러니까 영에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분명 그들만의 세계는 따로 존재했다.
그러니까 물도 가르고 하늘 아래 아래를 만들어 층위를 다져 놓은 것이다.
창조주는 지구를 맡아 그들의 시스템대로 작동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 나와라 뚝딱” 하면서 창조한 것이 아닌 만들었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은 흙으로 만든 로봇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또한, 인간이 흙과 물 성분과 같다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는 관습이 괜히 생긴 게 아닌 것 같다.
8. 인간을 만들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은 아니지만 신은 인간에게 확실한 명령을 내렸다.
세상 만물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조금 잔인하게 들릴 수 있는 대목일수도 있지만 신은 인간에게 약육강식을 허락했다.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을 정리하자면 일단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일이다.
그것도 성인 남녀를 만들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그러니까 특정할 수 없는 형체, 성령인지 하나님의 동료인지 자가분열인지 어쩐 지는 모르겠다.
창조주는 분명 “우리”라는 표현을 하였고 그것을 모티브로 인간을 창조하게 된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 완벽하게 하나님과 같다고 보기는 확실치 않다.
8.1. 기계 인간의 탄생?
본떠 만들었다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듯 어떤 기계로 찍힌 게 아닌 이상 흙으로 빚었다면 비슷한 형상이지 똑같은 형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나름 결과물에 만족을 했다는 거다.
또한, 여태 식물은 특성별로 모으고 동물도 하늘을 날거나 물속에 살거나 등의 특징으로 만들었다면 인간은 유일하게 암수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28절 신이 이들에게 축복과 동시에 책임을 지게 한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8.2. 생육하고 증식하라
신이 남과 여를 만들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린 후 통치 권력을 위임하였다.
신이 남과 여에게 자손을 증식하라는 명도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고들 하는데 구체적 명시는 없던 걸로 안다.
놀라운 점은 생육 혹은 생산하고 증식하라는 표현이 인간 아이를 낳는 것보다 마치 기계적인 생산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의혹이 강하게 든다.
신도 절대자 단수인 것 같고 그의 아들 예수도 독신으로 살다 갔다.
그러면서 인간을 창조할 줄도 아는데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서 이들에게 자손을 번성하게 한 걸까?
8.2.1. 자기 복제
여기서 생뚱맞은 공상을 곁들이자면 자기 복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자손을 번식해라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인류는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신은 인간을 통해 자연의 산물을 지배하고 통치할 권한을 주었다.
그들의 번성과 정복 책임만 지게 하는 걸로도 충분해 보였는데 여자 인간을 통해 그저 번식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 점도 신이 일일이 아담을 만들기가 번거로우니 자체 시스템을 개발하여 그렇게 여자에게 벌을 주는 명목으로 맡겨 버린 거다.
9.신이 구성한 초식의 세계
29절 “너희들”이 아닌 “너에게” 음식으로 할 식물을 준비한 것부터가 궁금하다. 진짜로 신은 여자는 그냥 여벌로 만들었나 보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놨으면 “너희들”이라고 해야 하는데 “너에게”라고 말하니 일단 지구의 통치자는 아담에게만 전권을 준 것 아닌가?
그리고 마치 훗날 아담과 이브가 사고 칠 것도 미리 안 것처럼 보인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다 있으니 먹으라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마치 우연의 산물이 아닌 치밀한 계획 하에 모든 것을 준비한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또 궁금한 점은, 사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음식을 먹일까 말까를 고민했다고 본다.
9.1. 정화조 역할
식물들이며 각종 초목들 그것도 실한 것들만 모아서 열매 맺고 번성하라고 했다.
그것들이 차고 넘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이것들을 인간에게 먹여서 나름의 정화조 역할을 하게 하자 그런 게 아닐까?
결국 먹고 싸는 행위로 땅을 더욱 기름지고 번성하게 한 거다.
인간에게는 지배 의무도 주었지만 관리 의무도 주었기에 지구의 산물을 경작하고 청소하고 관리하는 데 힘을 써야 하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입과 항문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본다. 사실 코로 냄새만 맡아도 에너지가 충전되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손가락을 어딘가에 꽂아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일단 창조주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 사회에도 과도한 잉여로 인해 인간이 욕심을 부리고 싸우게 되었듯이 신의 입장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똑같았고, 어쩌면 식물과 동물을 더 중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통치와 지배 권한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살생을 명한 건 아니니까.
창세기 1장 30절은 짐승이나 날아다니는 새들에게도 푸른 식물을 먹으라는 공표를 한다. 인간은 열매나 과실 같은 것을 먹고 동물들에게는 초록 잎 등을 먹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나 동물 그 누구에게도 살생은 허락하지 않은 것이고 자연의 산물 그대로를 먹게 시스템화 한 것이다. 잉여의 산물은 먹고 싸는 걸로 해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것도 있지만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 아름답고 순수한 일종의 파라다이스를 구현한 게 아닐까 한다. 되게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세상 그런거 있잖아. 북유럽 신화도 보면 남과 여를 나무로 만들었다고 나오던데. 초록으로 덮인 지구에 누가 살러 와서 지어낸 얘기인 것인지 진짜로 창조주가 계획하고 그리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창조주는 짐승, 새, 기어 다니는 동물 등 모든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위해서 초록 식물을 먹으라고 하였다. 자신의 피조물을 본 신의 보시기에 매우 흡족해 했다. 나라도 뿌듯 했을 것 같다. 롤플레잉 게임 같은 거 할 때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엄청 뿌듯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니 여섯 번째 날이었던 것이다.
결론: 우주 창조 이야기의 현대적 해석
스티븐 호킹 박사는 신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다만 확실한 건 지구는 창조된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달도 창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창조주께서는 물을 가운데 모으고 마른땅 위에 식물을 번성하게 하는 게 먼저였다. 산소 증가로 인해 일종의 지구 온도를 맞추기 위함이었을까? 혹은 식물이 어떤 유해한, 불필요한 가스를 흡수하고 정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식물 없는 지구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생물이 존재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이 난 것인데, 다른 행성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개나 로봇을 먼저 보내는 것이 아닌 식물 종자를 먼저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창조주가 지구 위에 한 것처럼 모든 종자를 퍼뜨리고 어떤 종자가 잘 번식하는지 지켜보면서 “보기에 좋았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우주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현대 과학의 우주 기원 이론과는 다른 언어와 관점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주는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가 아닌, 의도와 목적을 가진 창조주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의 첫 구절들을 읽으며 과학적 사실 여부를 넘어, 인류가 오랫동안 묻고 답해온 근원적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그 시작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세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하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