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정갈한 인생 궤적과 두 작품 비평

괴테의 정갈한 인생 스토리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독일을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자연과학자 그리고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다. 괴테의 정갈한 인생 궤적을 보면 그의 일생과 업적은 서양 근대 사상 흐름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괴테의 정갈한 인생 그라프

괴테의 정갈한 인생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이프치히와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을 공부하여다. 평소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1774년 25세에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로 유럽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책 이후 그는 질풍노도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는 이후 공작의 초청으로 바이마르 궁정에 들어가 고위 관직을 맡으며 행정, 광산업, 군사, 연극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832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유언처럼 남긴 말은 ‘더 많은 빛을’ 이었다.

괴테의 주요 업적

괴테의 주요 작품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외 파우스트가 있다.

괴테 평생에 걸친 대표작으로 인간의 구원, 지식 탐구, 존재 의미를 다룬 철학적 대서사시로 서양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빌헬름 마이스트의 수업시대는 독일 교양소설의 원형이 된 작품이다. 개인의 성장과 자아 실현을 중심으로 한 소설 형식을 정립했다.

괴테는 그밖에 자연과학과 철학 및 인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색채이론, 식물 형태학, 해부학 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의 색채이론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적 설명을 비판하며, 인간의 감각과 인식을 기반으로 한 색의 심리학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의 철학 및 인문학은 계몽주의, 낭만주의, 고전주의를 아우르는 독자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인간 존재의 통합성과 조화를 추구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실현하였다.

괴테의 정갈한 연애사

괴테는 매우 복잡하고 풍부한 사생활을 보낸 걸로도 유명하다. 여러 여성과의 교제는 물론 사생아 문제까지 있다.

그러나 괴테의 정갈한 인생 스토리를 알고 나면 이것은 단순 프레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괴테의 사생활에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귀족 신분의 그가 평민 출신 여성과 살았기 때문에 생긴 구설수였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파격적인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하튼 괴테의 이러한 사생활은 그의 작품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괴테의 첫사랑은 21살에 찾아왔다. 당시 16살의 프리데리케 브리온은 질풍노도 운동 시기에 만난 목사의 딸이다.

그녀와 순수한 사랑을 경험 후 그의 초기 서정시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괴테가 사회적 성공을 위해 그녀를 떠나면서 죄책감과 슬픔 등이 그의 작품에 깊게 남았다.

괴테가 23살에 만난 샤를로테 부프는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여 베르테르 열풍을 일으키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여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는 괴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으로 꼽힌다.

1788년 바이마르 궁정에서 일하던 그는 조화를 만드는 평범한 여성 크리스티아네를 만났다. 괴테 나이 39세였고 그녀 나이 18세였다.

괴테는 그녀와 동거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당시 사회적 관습을 깬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다음 해 그녀는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를 낳았다.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단지 결혼을 안 했을 뿐인데 아들은 사생아가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쏟아냈다.

그리고 1806년 괴테는 마침내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그녀를 위한 연금 제도 등 나름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이 우려와 비난을 한 부분은 그녀가 귀족이 아닌 평범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계급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괴테는 궁정에서 일하는 귀족 신분이었다.

당연히 귀족 부인들이 모이는 사교 모임에 크리스티아네는 초대 받지 못하였고 괴테는 종종 혼자서 공식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당연히 크리스티아네는 상대적 고립감을 느꼈다. 결혼 후에도 많은 여성과 교제를 하긴 했지만 조강지처는 크리스티아네 뿐이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인지 크리스티아네는 1816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괴테는 그녀 죽음 이후 내 삶의 절반이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며 슬퍼했다.

괴테의 정갈한 인생 중 마지막 뮤즈

그러더니 크리스티아네가 죽은 지 5년 뒤, 72세의 괴테는 당시 17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2년 후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청혼까지 했다가 거절 당했다. 울리케 엄마가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고 울리케도 망설임이 컸다.

늙은이가 보통 주책이 아니었지만, 괴테 자신은 청혼을 거절 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마리엔바트의 비가라는 절절하고 순수한 희대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에서 괴테는 사랑, 시간, 허무, 죽음, 예술을 결합하며 인생 말기에 도달한 인간 심연을 성찰하였다.

내가 소유한 것은 멀리 있는 듯 보이고, 사라진 것은 나에게 현실이 된다.

울리케는 괴테를 깊이 존경했지만 연인으로서의 감정은 당연히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울리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는 여러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고 9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교양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의 울리케는 괴테에 대한 애정을 직접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버지 같은 친구로 선을 그었으며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어떤 일도 없었다.

그녀는 괴테의 마지막 뮤즈로 알려지며 오늘날 체코의 로우카 지역에는 그녀를 기리는 박물관이 존재할 정도이다.

괴테가 미친 영향력

괴테는 대문호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문학과 과학, 예술과 정치, 감성과 이성을 아우른 근대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는 니체, 토마스 만, 헤겔, 융, 발터 벤야민 등 후대 지성인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합적 인간관은 오늘날까지도 예술과 학문의 이상형으로 평가 받는다.

괴테의 명작 분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선택적 친화력 작품 비평

괴테의 두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선택적 친화력’은 각각 괴테의 초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인간 감정과 사회질서, 자유의지와 운명 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 문학사에서 질풍노도 운동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이는 계몽주의의 이성 중심 사고에 대한 반발로 감정, 자연,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상주의적 예술가다. 사회적 질서와 감정의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로 샤를로테를 짝사랑한다.

베르테르의 비극은 단순한 짝사랑의 실패가 아닌 사회적 규범과 감정적 충동 사이의 불화를 극적으로 표출한 것이 핵심이다.

이 소설은 서간체 형식을 통해 베르테르의 내면 독백을 극대화 하였다.

따라서 독자는 감정의 파국으로 몰락하는 주인공을 따라가며 감정 이입과 비판적 거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 작품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 죽어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학문 용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이 용어는 현대에도 적용되어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해서 죽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 혹은 베르테르 증후군이라고 할 정도이다.

당시 이 작품 속 주인공 베르테르는 개인의 내면과 사회 질서의 충돌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제기하였다.

괴테의 감정의 정치학에 대한 실험이었고 이 감정은 혁명적이었고 파괴적이었다.

괴테 자신은 나중에 이 작품을 내 젊음의 병이라 표현하며 감정의 절대화에 대해 일정한 반성의 거리를 두기도 했다.

선택적 친화력 (1809)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 후기의 대표작으로 바이마르 고전주의 정신이 반영된 복합 서사로 평가 받는다.

작품 속 감정은 더 이상 자유롭게 분출되지 않으며, 자연 법칙과 인간 의지, 도덕 사이의 긴장이 중심 문제로 제시된다.

선택적 친화력은 화학 반응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선택적 친화력은 토르베른 베르크만 화학자가 만든 개념 용어이다.

화학 반응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특정 물질이 특정 대상과만 결합할 수 있다는 원리를 괴테는 인간 관계로 투영하였다. 괴테의 소설 속 주인공 4명은 마치 실험실의 원소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끌리고 결합하고 이탈한다.

괴테는 여기서 감점이 마치 자연 법칙처럼 작동한다는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선택적 친화력 개념 창시자 토르베른 베르크만에 관하여 알아보기

소설 선택적 친화력이 주는 교훈은 도덕과 운명, 자유의 문제이다. 사랑은 개인의 선택인가 운명의 법칙인가, 그리고 도덕적 책임과 감정적 충동이 충돌할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글이다.

괴테는 선택적이라는 말이 주는 자유의 환상을 뒤집으며 사랑조차도 자연 법칙처럼 불가피하다는 운명론적 비관을 담았다.

이 작품은 인간 관계를 윤리적, 감정적 차원이 아닌 자연과학적 매커니즘 속에 가둠으로써 고전주의적 질서에 대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선택적 친화력 비교 비평

괴테는 청년 시절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일 전역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만들었다.

그의 책으로 인해 모방 자살을 유발하였고 일부 도시에서는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특히 청년층에겐 자극적인 책이었다.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가 60대에 쓴 작품이다.

계몽주의를 비판한 질풍노도 운동을 이끈 그는 60대 장년이 되어서 나름의 자기 진화를 하였다.

격정적으로 분출하던 젊은 베르테르에서 선택적 친화력으로 자기 진화를 보여 주었다. 그는 사랑도 일종의 화학 반응 같은 것이며 절대적이거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감정에 매몰되던 과거를 반성하고 선택의 불가피성, 혹은 숙명으로 주어진 인생 그리고 사랑의 화학적 결합을 담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감정의 신화에서 감정의 해체이다.

그는 질풍노도주의에서 계몽주의로 선회한 느낌이다. 완벽하게 꼬장꼬장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자연의 법칙과 섭리에 따라 순응의 미덕을 이해하면서 지난 시간, 그러니까 감정에 매몰되던 시기를 반성하고 진화한 느낌이 역력하다.

결과적으로 괴테는 선택적 친화력을 통해 감정과 이성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비관적 통합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비관적 통합주의하니 생각하는 캐릭터가 있다. 드라마 트루디텍티브에서 러스터 형사가 그렇다. 그는 자신을 비관적 낙관주의라고 하였는데 드라마 속 세계관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맞물려 있다.

독일이 낳은 최고의 사상과 괴테와 니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 그러나 둘다 비관적 사고를 갖는 부분에서는 비슷해 보인다.

비관적 통합주의 괴테와 비관적 낙관주의 기질을 지닌 니체의 비교 연구는 후술하도록 하고 관련 드라마는 강추한다.

괴테의 후기 작품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가 감정의 절대성을 경계하고 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인과 법칙 속에 위치시키려는 계몽적, 결정론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순한 계몽주의 회귀라기 보다는 감정주의와 계몽주의 모두 초월하고자 한 괴테적 인간 이해의 종합적 시도, 쉽게 말해 나이가 들어 철이 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괴테의 정갈한 인생 궤적 평가

괴테는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은 균형감각이 탁월한 인간이었다. 예술에 몰두한다고 사생활이 문란하지도 않았고, 사회적 지탄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해 준 평민 여성과 책임과 감사를 느끼고 평생 책임지며 자식까지 낳았다.

청년기에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문학으로 승화시켰으며 베르테르처럼 자멸하지도 않았다.

말년에 만난 울리케와의 짝사랑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하며 담담히 받아 들일 줄 알았다. 괴테는 광기나 중독에 의존하지 않았고 모든 면을 통달하고 아우르는 통합적 인간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하였고 단명하거나 파멸한 예술가들과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삶 전체가 하나의 완성 작품처럼 다듬어졌다.

사회적인 삶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개인이기도 했지만 공직자로서의 책임도 다했다. 현실 도피형 예술가가 아닌 삶과 문명을 동시에 다루려는 이성적인 예술가였고 낭만적이고 정갈한 인간이었다.

괴테는 내면의 정열은 시와 소설로 풀어 승화할 줄 알았고 현실에서는 항상 한 걸음 떨어져 관찰자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니체처럼 극단으로 가지도 않았고 쇼펜하우어나 헤겔처럼 이념화되며 고립을 자초하지도 않았고 삶과 작품을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다듬을 줄 알았다.

정갈한 인생의 표본을 산 괴테는 남다른 소녀 사랑도 느껴진다. 그녀가 사랑한 여자들은 전부 연령대가 어렸다.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여성상을 지향했다고 본다. 이것은 그의 경건한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순수함을 추구했다. 아름다움 위에 숭고하고 순수한 여성미를 추앙했던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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