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정치학에 관하여

1. 질투의 본질: 하나님도 피해갈 수 없었던 감정

질투는 인간의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파괴적인 감정이다. 놀랍게도 성경 출애굽기 20장에는 “질투하는 하나님”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은 질투가 얼마나 강렬하고 무서운 감정인지를 보여준다.

전지전능한 존재조차 질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인간이 이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점적이고 열정적인 것처럼, 인간의 질투 역시 깊은 사랑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2. 20년 우정을 파괴한 질투의 정치

2-1.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선 갈등 시작

한동훈과 윤석열 둘이 나란히 선 모습

윤석열과 한동훈은 20년을 함께한 형님 동생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검사 생활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한동훈은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며 선배들의 신임을 얻었지만, 윤석열은 정반대였다. 동료 검사들에게 미움을 받아 소위 ‘왕따’로 지내던 윤석열에게 한동훈은 의리 있게 다가와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모든 면에서 타의 모범이었던 한동훈에 비해 윤석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50이 넘어서야 결혼했고 자식도 없었으며, 아내는 각종 구설수에 시달렸다. 그런 윤석열에게 한동훈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잘나가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자신도 능력 있어 보이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2. 대통령이 된 후 달라진 윤석열 한동훈 갈등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동훈을 법무부 장관으로 파격 승진시키며 엘리트를 대거 등용했다. 정권 초기에는 한동훈 덕분에 윤석열이 묻혀가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일련의 실책이 이어지더니 총선을 앞두고 60석도 어려운 상황이 되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동훈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윤석열은 세상 오만해진 상태였고, 한동훈이 조금만 거슬리는 말을 해도 “감히 건방지게”라며 일축했다.

2-3. 윤석열의 질투 폭발과 파괴적 행동

비대위원장을 시키면서도 국회의원 출마는 하지 말라고 했고, 기자들의 질문에 원론적으로 대답한 것을 꼬투리 잡아 한동훈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린 것을 두고 “저기서 왜 자기 선거운동을 하고 있냐”며 격노했다.

한동훈의 인기가 자신의 인기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윤석열은 질투의 마수에 걸려 사사건건 한동훈의 모든 일에 방해를 일삼았다. 심지어 극우 유튜버들까지 동원해서 한동훈을 공격했다. “선거에서 져도 된다, 이겨서 한동훈 기 사는 꼴 못 본다”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2-4. 당 대표 당선과 극에 달한 갈등

한동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선거 패배 후 당 대표에 출마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윤석열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모든 것이 한동훈 죽이기에 집중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계엄령도 한동훈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대선을 앞두고는 한동훈을 방해하겠다며 김문수, 한덕수 등을 거론하다가 결국 김문수가 후보가 되면서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줄 위기에 처했다. 윤석열에게는 한동훈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었다. 물론 친윤계의 공작질은 지속되고 있다.

3. 예술과 문화 속 질투의 비극

3-1.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

영화 속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의 질투는 음악적 천재성을 질투한 대표적 사례다. 모차르트의 타고난 재능 앞에서 자신의 평범함을 견딜 수 없었던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파멸시키려 했다. 그 질투는 결국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으며 스스로를 “평범함의 수호자”라는 비참한 존재로 만들었다.

3-2.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오셀로는 질투가 어떻게 이성적인 사람을 맹목적 광기로 이끄는지 보여준다. 이아고의 교묘한 조작에 넘어간 오셀로는 순수한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살해한다. 진실을 알게 된 후 절망에 빠진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4. 해외 사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비극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총리와 고든 브라운 전총리

영국 정치사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80년대부터 20년간 절친한 사이였던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노동당 현대화의 동반자였다. 경제학 박사 출신의 정책통 브라운과 뛰어난 화술의 블레어는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하지만 1994년 당수 경선에서 브라운이 블레어에게 양보한 후부터 균열이 시작됐다. 브라운의 뛰어한 경제 정책으로 영국이 호황을 누렸음에도 모든 공은 총리인 블레어가 가져갔고, 브라운은 점점 공개적으로 블레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0년 후 총리직을 넘겨주겠다”는 블레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브라운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2006년 “블레어 축출 쿠데타”까지 주도했다. 결국 13년간 집권하던 노동당은 내분으로 2010년 총선에서 참패하며 보수당에 정권을 내줬다. 개인적 질투가 당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6. 조직적 한동훈 공격: 대통령실의 직접 개입

윤석열과 한동훈의 갈등이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났다. 김대남 전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이 유튜브 언론에 한동훈 공격을 사주한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녹취에서 김 전 행정관은 “김건희 여사가 한 후보 때문에 죽으려고 한다. 너희가 이번에 잘 기획해서 치면 여사가 아주 좋아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언론 조작을 지시했다. 이는 대통령실이 조직적으로 한동훈을 제거하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김대남 행정관이 서울의 소리 기자 이명수와 정치 공작한 녹취를 텍스트화해서 공개한 이미지

한동훈도 이 문제를 윤석열에게 직접 제기했다. 81분 면담에서 한동훈은 “김 여사 라인과 소통하는 보수 유튜버들이 저와 당을 공격한다”며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계엄 사태 이후에도 친윤 유튜버들의 한동훈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이들이 여전히 윤석열 부부의 영향력 하에 있으며, 김건희 여사 보호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투가 개인을 넘어 국가 기관까지 동원하는 파괴적 힘으로 작용한 셈이다.

6-1. 지속되는 공격의 배후와 동기

2025년 현재도 고성국, 배승희, 전여옥 등 극우 성향이나 민주당 출신 전향자들이 한동훈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정치적 생존 본능이 크게 작용한다. 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넘어온 전향자들은 자신들의 입지 확보를 위해 “더 보수적”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며, 한동훈 공격을 통해 친윤 세력에게 충성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유튜브 수익 구조상 극단적 발언과 선정적 내용이 더 많은 조회수를 가져오면서, 한동훈 비판이 “안전한 먹거리”가 되었다.

윤석열 측의 지속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윤석열이 직접 말리지 않는 것 자체가 묵인과 동조의 신호로 작용하며, 이들은 김건희 여사 라인과의 연결고리를 통한 정치적 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이 탄핵·구속 위기에 처하면서 “마지막 보루”를 지켜야 한다는 심리와 한동훈의 탄핵 찬성에 대한 배신감이 복수심으로 발전했다. 이들에게 한동훈은 “20년 은혜를 저버린 배신자”이자 “윤석열을 배신한 핵심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6. 질투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

5-1. 사회적 폭력의 원인

질투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사회적 질투는 종종 약자나 소외계층을 희생양으로 삼아 집단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역사상 마녀사냥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5-2. 현대사회의 비교 불안

매체의 발달로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게 된 현대인들은 ‘비교 불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질투에 시달린다.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이 일상이 되면서 만성적인 불만족과 사회에 대한 불평이 증가하고 있다.

6. 질투를 넘어서: 성찰과 성장의 가능성

질투는 항상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윤석열처럼 자기 파멸을 넘어 나라를 망치는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질투는 타인이 아닌 우리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정치적 비극은 권력에 대한 질투가 어떻게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검게 물들였는지 보여준다.

질투의 불길이 우리를 태우기 전에, 그 에너지를 창조적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아를 찾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질투는 인간의 조건이지만, 그것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질투조차도 의미 있는 인생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질투는 자아를 발전시키는 힘이 되어야지 분노를 유발하여 자멸하는 힘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포스팅 원문 보기: 하나님도 제어하지 못한 무서운 질투의 힘

인생의 숨겨진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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