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의 스타 릴리 랭트리
빅토리아 시대의 스타 릴리 랭트리(Lillie Langtry)는 흔히 “에드워드 7세의 세 번째 정부”라는 자극적인 수식어로 먼저 호출되지만, 그 표현만으로는 그녀의 실제 위상을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녀는 19세기 말 영국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현대적인 여성상이자, 미모·연기·사업 감각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다만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서사에는 연대와 사실이 뒤섞인 부분도 적지 않다. 릴리 랭트리의 생애를 정확한 팩트 위에서 재구성하면, 그녀가 단순한 왕실 스캔들의 주인공이 아니라 시대의 경계를 밀어낸 선구적 여성임이 분명해진다.
1.성직자의 딸로 태어난 ‘섬의 미인’
빅토리아 시대의 스타 릴리 랭트리 그녀는 1853년 영국령 저지섬(Jersey)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비교적 명망 있는 성공회 성직자였고, 이 점에서 “하층 출신의 요부”라는 흔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부유한 귀족 가문은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화려한 삶이 보장된 인물도 아니었다.
그녀의 미모는 지역 사회에서 일찌감치 화제가 되었고, 특히 자연스럽고 인공미를 배제한 외모는 당시 과장된 장식과 화장에 익숙했던 빅토리아 사회에서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결혼과 런던 진출, 그리고 사교계의 발견
릴리는 1874년, 스무 살 무렵 에드워드 랭트리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흔히 ‘재력가와의 결혼’으로 서술되지만, 사실 에드워드 랭트리는 안정적인 수입은 있었으나 상상할 만큼 부유한 인물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은 빠르게 권태에 빠졌고, 결정적인 전환점은 1877년경 런던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찾아온다.
특히 그녀가 단순한 검은 드레스와 자연스러운 머리차림으로 파티에 등장했을 때, 기존의 미적 규범을 뒤흔드는 존재로 주목받았다.
이 시점에서 릴리는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뮤즈가 되었고, 그녀를 모델로 한 초상화와 이미지들은 대량 복제되어 상점과 가정에 걸렸다.
이는 단순한 초상화 모델 활동이 아니라, ‘이미지의 대중 소비’라는 근대적 현상의 초입에 그녀가 서 있었음을 의미한다.
3.에드워드 7세와의 관계, 그리고 오해된 연대
릴리 랭트리가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와 관계를 맺은 것은 187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흔히 “세 번째 정부”라는 표현이 사용되지만, 이는 공식적인 서열 개념이라기보다 후대의 정리 방식에 가깝다.
중요한 점은 이 관계가 1880년대 초반에 이미 종료되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바로잡아야 할 점은 사생아에 관한 이야기다.
릴리는 1881년 딸 잔느 마리(Jeanne Marie)를 낳았으나, 이 아이의 생부는 에드워드 7세가 아니라 다른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왕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서사는 당시 대중의 상상과 스캔들 소비가 만들어낸 과장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 자체가 릴리의 명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배우로서의 공식 데뷔와 실질적 성공
릴리 랭트리가 배우로 공식 데뷔한 것은 1881년이다. “1899년 여성 최초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다.
그녀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무대에 섰고, 그 자체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상류층 여성이 직업 배우가 되는 것은 사회적 금기를 건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왕자의 애인이 무대에 선다”는 호기심이 관객을 끌어모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연이 이어질수록 릴리는 발성, 감정 표현, 무대 장악력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았고, 비평가들 역시 그녀를 단순한 미인 배우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투어 극단을 조직해 대서양을 건너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영국 여성 배우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성취였다.
5.스캔들을 자산으로 바꾼 여성 사업가
릴리 랭트리의 진정한 독보성은 무대 밖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배우로 벌어들인 수익을 부동산, 경주마 사업 등에 투자하며 자산을 체계적으로 불려 나갔다.
특히 경마계에서의 성공은 우연이 아닌 치밀한 분석과 안목의 결과였고, 이는 그녀를 “자립한 여성 자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은 법적·경제적으로 제약이 많았지만, 릴리는 유명인이라는 지위와 수입을 활용해 이를 우회적으로 돌파했다. 연애 스캔들로 소비되던 이미지 이면에는, 자신을 둘러싼 욕망과 시선을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한 냉정한 전략가가 존재했던 셈이다.
6.릴리 랭트리가 남긴 것
릴리 랭트리는 미인도, 정부도, 배우도 맞지만 그 어느 하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스캔들 구조 속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구조를 역이용해 자신의 생존과 성공을 설계했다. 에드워드 7세와의 관계는 그녀 인생의 일부였을 뿐 전부는 아니며, 오히려 그 이후의 삶이야말로 릴리 랭트리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질문을 몸으로 던진 존재였다.
여성이 아름다움과 욕망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무대에 서고 돈을 벌며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그 답을 릴리 랭트리는 이미 19세기에 증명해 보였다.
7.미모의 권력화와 대중적 우상화의 두 얼굴

릴리 랭트리와 릴리 엘시는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두 시대인 빅토리아 시대를 끝맺고 에드워드 시대를 열었던 최고의 아이콘들이다.
두 여인은 이름이 같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이자 대중의 선망을 받는 ‘셀러브리티’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들이 명성을 획득한 방식과 대중에게 소비된 이미지는 시대적 배경만큼이나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릴리 랭트리가 미모를 권력화하여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한 인물이었다면, 릴리 엘시는 대중 매체의 발달과 함께 박제된 ‘시대의 요정’에 가까웠다.
7.1.관능적 주체성과 청순한 대상화의 대비
릴리 랭트리의 명성은 19세기 후반 사교계의 정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성숙한 체격을 지닌 전형적인 고전 미인이었으며,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독립을 위한 자산으로 정확히 인지했다.
반면 20세기 초 사진 엽서의 황금기에 등장한 릴리 엘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냘픈 선과 청순한 미소로 대중을 매료시켰다. 랭트리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여신’의 형상이었다면, 엘시는 누구나 엽서 한 장으로 소유할 수 있는 친근하고 가련한 ‘요정’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7.2.예술적 뮤즈와 상업적 모델의 경계
두 인물의 명성이 확산된 경로는 당대 기술적 진보를 투영한다.
릴리 랭트리는 주로 존 에버렛 밀레이와 같은 거장들의 유화 초상화를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명성을 공고히 했다.
이는 상류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권위적인 명성이었다.
반면 릴리 엘시는 사진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수만 장의 사진 엽서가 팔려나가는 전례 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랭트리가 예술계의 정점에서 아래로 그 영향력을 전파했다면, 엘시는 대중 매체의 확산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팬덤 현상의 시초를 보여주었다.
8.야심가와 은둔자라는 서로 다른 결말
명성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이들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릴리 랭트리는 자신을 향한 추문과 관심을 영리하게 사업으로 연결했다. 배우로서 무대에 서고 화장품 광고 모델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말년까지 당당하게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반면 릴리 엘시는 쏟아지는 대중의 시선과 명성을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최고의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은둔을 선택하며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했다.
결국 릴리 랭트리는 시대를 이용한 승부사로, 릴리 엘시는 시대를 상징했으나 시대에 짓눌린 우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