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관능의 여신 잔느 모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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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 여배우 잔느 모로 이야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섹시함의 대명사 잔느 모로는 1960년대 뛰어난 연기와 세련된 태도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스타다.

그녀 세대에서 가장 상징적인 세 명의 프랑스 여배우로 카트린 드뇌브, 브리지트 바르도, 잔느 모로를 꼽는데, 그중에서도 유명 감독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한 배우는 잔느 모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성과 관능의 여신

지성과 관능의 여신 잔느 모로 하지만 그녀는 뾰루지가 난 피부에 겁을 먹은 것 같은 큰 눈, 피곤해 보일 정도로 두툼한 아이백에 그늘이 진 눈 밑, 양끝이 처진 입술로 전형적인 미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특유의 다소 나른한 음성으로 시크한 프렌치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여태 그런 모습으로 등장한 배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잔느모로 페이스

누벨바그의 여신

잔느모로는 1958년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그녀는 마성의 여우라고 불렸다.

1961년 영화 <연인들>에 이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독특한 사랑을 다룬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쥘 엣 짐> 이후 그녀는 누벨바그의 여신이 되었다.

지금 봐도 감각적인 이 영화 속 그녀의 단출한 복장은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사랑받았다.

잔느 모로의 어린 시절

잔느 모로는 1928년 1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나톨 모로는 술집 주인이자 식당 지배인이었고, 어머니 캐서린 버클리는 폴리 베르제르에서 틸러 걸스와 춤을 추러 온 랭커셔 출신의 영국 무용수였다.

아나톨 모로의 가족은 대대로 농부였다.

잔느가 태어난 지 1년 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비시로 남쪽으로 이사하여 작은 호텔과 식당을 열었다.

잔느는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다녔고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나무를 오르는 등 극심한 말괄량이로 자랐다.

모로 부부의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나톨은 술을 많이 마셨고 영어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가족은 아나톨이 댄서와 결혼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캐서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동안 캐서린은 잔느와 여동생을 데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선포되자 남편과 함께 있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쟁 동안 잔느의 부모는 헤어졌다.

아버지가 프랑스 남부에 머물렀던 동안, 어머니는 적국 외국인으로서 게슈타포에 매일 등록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잔느와 어머니, 여동생은 위안소 위의 아파트에 살았다.

잔느가 거리를 뛰어 내려갈 때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긴 줄의 군인들을 지나 서둘러 지나치곤 했다. 어두운 시간이었고 잔느는 책의 세계로 빠져 지냈다. 그녀는 “너무 빨리 많은 책을 읽었다. 그들이 나를 공포와 매혹으로 아프게 했다”며 13살 때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되기까지

그러나 15세 때 라틴어 수업을 빼먹고 장 아누일의 <안티고네> 공연을 보러 갔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고 배우가 되기로 한다.

그녀는 파리 콘서바토리에 다녔고 프랑스의 유일한 국립극장인 코미디 프랑세즈 소속 배우가 되었다.

업계에선 그녀를 사라 베른하르트의 현신이라고 극찬하며 인정하였고 그녀의 엄마도 그녀가 배우로 활동하는 것을 응원했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녀가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를 때릴 정도로 극심한 반대를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잔느 모로는 약 3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다 1949년 배우 장 루이 리샤르와 결혼하여 같은 해에 아들 제롬을 낳았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신생아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복귀하였고 부부 사이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951년에 헤어졌다.

뉴웨이브 스타로 거듭나다

잔느모로

연극 무대에서 탄탄하게 경력을 쌓은 그녀는 1950년대 빠르게 프랑스 주류 영화계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프랑스의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의 선구자로 불린 루이 말을 만난 뒤부터 잔느 모로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감독은 잔느 모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였고, 그녀의 눈 밑 그늘과 비대칭적인 얼굴 등 비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데 성공하였다.

루이 말은 잔느 모로와 함께 브리지트 바르도를 주연으로 한 영화 비바 마리아를 통해 케미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프랑스 스타일의 뉴웨이브는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비를 종일 맞으며 밤거리를 걷는 여성의 인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일련의 장치와 연출로 인해 그녀는 뉴웨이브 스타로 거듭났다.

페미니스트의 아이콘

잔느 모로는 1977년에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과 결혼했지만 1980년에 또 헤어졌다.

그러나 그와 10년 동안 20편 이상의 작품을 찍으며 동료로 잘 지내긴 했다.

잔느 모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기를 했다고 하였는데,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인생에 관한 그녀의 관점을 두고 “인생은 산이고 당신은 올라가서 내려오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몸이 불타도록 열심히 삶이라는 산에 올랐다.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기도 한 그녀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선언한 적도 있다.

2017년 7월 31일 8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하였고 마크롱 대통령은 그녀의 숭고한 삶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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