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학의 최초의 단편 소설 토비트서(The Book of Tobit)

토비트서 이야기

토비트서 (The Book of Tobit)는 성경 문학사에서 “최초의 단편 소설(Novella)”이다.

요즘으로 치면 ‘오리엔탈 판타지 로맨스 스릴러’라고 부를 수 있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토비트서

1.토비트서 소개

개신교에서는 정경(Canon)으로 인정하지 않아 생소하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정경으로, 성공회에서는 준정경으로 읽힌다.

토비트서 이야기 이는종교적 교훈을 떠나 문학적 구성(Plot)과 캐릭터(Character)가 기가 막힌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토비트 서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낸다.

참새 배설물에 눈이 먼 의인, 첫날밤마다 남편을 죽이는 악마, 그리고 물고기의 내장으로 행하는 구마 의식까지.

이 이야기는 성경이라기보다는 고대 오리엔탈 판타지 혹은 오컬트 누아르에 가깝다.

2.왜 정경(Canon)에서 제외되었는가?

가톨릭과 정교회 성경에는 이 책이 포함되어 있지만, 개신교 성경(66권)에서는 빠져 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신학적 충돌: “자선이 구원을 주는가?”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와 개혁가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토비트 12:9)

개신교의 핵심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받는 것인데, 토비트서 이야기 에는 ‘행위(자선)로 죄가 씻긴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나 공로 사상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였기에, 개혁가들은 이 책을 정경에서 배제한 것이다.

2.1.주술적 요소

“물고기 내장 마법” 성경의 기적은 보통 “말씀”이나 “기도”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토비트서 이야기 는 물고기 심장을 태워 연기로 악마를 쫓고, 쓸개즙을 발라 눈을 치료합한다.

이것은 종교적 기적이라기보다는 고대 근동의 연금술(Alchemy)이나 민간 주술(Folk Magic)에 가깝다. 이교도적 색채가 짙다는 점도 정경 제외의 큰 이유가 되었다.

3.토비트서 이야기의 시작

토비트서 이야기 시작은 흡사 부조리극을 연상케 한다.

배경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주인공 토비트는 망국의 유민이자 독실한 신자다.

그는 앗시리아 왕의 눈을 피해 밤마다 거리에 버려진 동족의 시체를 수거해 장례를 치러주는 비밀스러운 삶을 산다.

흡사 고담 시의 자경단이나 누아르 영화 속 고독한 해결사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신은 이 고결한 영웅에게 가혹한 보상을 내린다.

밤새 시체를 묻고 지쳐 담벼락 밑에서 잠든 그의 눈 위로 참새가 뜨거운 배설물을 떨어뜨린 것이다.

이 황당하고도 치명적인 사고로 토비트는 실명한다.

평생 의롭게 살았으나 새똥 하나에 무너져버린 노인의 비극, 이것은 고대 작가가 던지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지독한 냉소다.

3.1. 사라

비슷한 시각, 메디아 땅에는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 사라가 있다.

그녀는 일곱 번 결혼했으나 일곱 명의 남편 모두가 첫날밤 신방에 들어오자마자 의문사했다.

범인은 아스모데우스라는 질투의 악마였다.

그는 사라에게 집착하여 그녀를 탐하는 모든 남자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남편 잡아먹는 여자라며 저주한다. 죽

고 싶다고 울부짖는 눈먼 아버지와 저주받은 과부. 토비트 서는 이 막장 드라마 같은 두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성경 역사상 가장 기묘한 원정대를 조직한다.

아버지의 빚을 받으러 떠나는 유약한 아들 토비아스, 인간으로 위장한 대천사 라파엘,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이 여정에 동참한 개 한 마리가 그들이다.

3.2. 개와 함께

이들의 여행길은 종교적 순례라기보다는 판타지 모험물에 가깝다. 티그리스 강에서 거대한 식인 물고기가 덮쳐올 때, 천사 라파엘은 기도가 아니라 사냥을 주문한다.

그는 물고기의 배를 갈라 심장과 간, 쓸개를 챙기라고 지시하는데, 이는 명백한 연금술적 레시피다.

토비트서 이야기

훗날 토비아스가 사라의 신방에 들어갔을 때 악마를 물리친 방법 역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구마 의식이 아니었다.

그는 챙겨온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향로에 넣어 태웠다.

그 지독한 연기와 냄새가 일으키는 화학적, 물리적 타격이 영적 존재인 악마를 괴롭혀 도망치게 만든 것이다.

이는 고대 근동에 만연했던 교감 주술의 전형으로, 성경의 기적보다는 위쳐나 마법사의 기술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이 토비트 서가 정경에서 탈락하고 외경으로 밀려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에게 이 책은 위험했다.

믿음이 아닌 물고기 내장 태우는 냄새로 악마를 쫓는다는 설정은 이교도적 주술과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선은 죽음에서 구원하며 죄를 씻어준다는 구절은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했다.

신학적 엄숙함의 잣대로 보기에 토비트 서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주술적이며, 동시에 매혹적인 불온서적이었다.

4.인간애와 문학적 상상력

그러나 역설적으로 교리의 무게를 덜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따뜻한 인간애와 문학적 상상력이다.

모든 모험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성경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들 뒤를 따랐다고 묘사한다.

짖지도 않고 기적을 행하지도 않지만, 그저 인간의 곁을 지키며 가장 먼저 가족의 재회를 알리는 개의 모습에서 고대인들은 신의 거창한 구원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 위로를 느꼈을 것이다.

토비트 서는 역사적 팩트라기보다는 당대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인 역사 소설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현대의 장르 문학 못지않게 세련되었다.

참새 똥으로 시작된 비극을 연금술과 마법으로 해결하고, 결국은 가족의 사랑과 반려견의 꼬리짓으로 마무리하는 이 이야기는 성경이 품지 못한 가장 B급스러운,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판타지의 정점을 보여준다.

5.윤리적 메시지와 디아스포라적 삶의 재해석

토비트 서는 단순한 기적담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재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윤리적 문학이다.

부모에 대한 효행, 자선과 공동체 돌봄, 가문과 전통의 계승 같은 요소는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억압과 불행 속에서도 경건한 삶이 결국 회복과 구원을 낳는다는 신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 지리적으로 흩어진 공동체가 여전히 하나의 신적 질서 안에 있다는 신학적 확신을 정교하게 형상화한다.

6.문학적 특징과 후대에 미친 영향

이 책은 서사적 완결성과 인물 심리 묘사에서 당시 외경 문학 중에서도 뛰어난 문학성을 보인다.

내러티브는 여행기와 기적담, 가정문학의 요소가 혼합된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라파엘을 통해 대화와 묘사가 은근한 긴장감 속에 배치된다.

후대 기독교 미술과 전례 전통에서 천사 라파엘이 치유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도 토비트기의 영향이 짙다.

또한 혼인·치유·여정이라는 모티프는 중세의 종교극과 설교문학에서도 자주 재해석되며,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현대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7. 예술가들이 사랑한 토비트 서

토비트서

이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B급 판타지는 수많은 예술가의 영혼마저 사로잡았다.

텍스트가 가진 시각적 화려함 덕분에 토비트 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통틀어 화가들이 가장 사랑한 소재 중 하나가 되었다.

청년과 천사, 그리고 개가 함께 걷는 구도는 그 자체로 완벽한 로드 무비의 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이야기의 여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토비아스와 천사를 찾아보길 권한다.

르네상스 초기의 걸작인 이 그림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숨어 있다.

당시 베로키오의 제자였던 어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구석에 있는 곱슬털 강아지와 물고기를 그렸다는 설이다.

거장의 붓끝에서 탄생한 강아지는 당장이라도 꼬리를 흔들며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7.1. 렘브란트외 작품들

조금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렘브란트는 토비트 서를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

토비트 가족을 떠나는 라파엘 천사 같은 작품에서 그는 단순히 신비로운 기적만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가 떠나는 순간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강아지의 뒷모습까지 그려 넣었는데, 거기엔 인간과 짐승을 초월한 영적인 경이로움이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필리피노 리피나 조반니 지롤라모 사볼도 같은 화가들이 그린 토비아스와 천사를 검색해 보면, 시대마다 달라지는 개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화가는 귀여운 애완견으로, 어떤 화가는 듬직한 사냥개로, 또 누군가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똥강아지로 그렸다.

하지만 그 모든 그림 속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그 개가 언제나 인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을 맞추며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텍스트가 삭제된 역사 속에서도 이미지는 살아남아, 우리에게 진정한 동행의 의미를 묻고 있다.

8.가톨릭에서는 결혼식 축사로 많이 사용되는 아이러니

피로 얼룩진 침실에서의 축가

사용자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에서 보면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낭만적인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낭독하는 텍스트가, 사실은 일곱 명의 전 남편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공포의 침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읊조린 ‘생존 신고’라니.

텍스트의 출처와 맥락을 아는 사람에게 이 상황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엽기 호러물에 가깝다.

가톨릭교회가 굳이 이 피비린내 나는 에피소드를 혼인 성사의 핵심 텍스트로 채택한 데에는 그들만의 기묘하고도 지독한 리얼리즘이 깔려 있다.

쾌락이 아닌 생존: 아스모데우스를 이기는 법

가톨릭 신학이 이 기괴한 기도를 선택한 논리는 ‘욕망의 통제’에 있다.

전승에 따르면 사라의 이전 남편 일곱 명은 모두 신부를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았기에 색욕의 악마 아스모데우스에게 멸살당했다.

즉, 그들의 죽음은 통제되지 않은 리비도에 대한 심판이었다. 반면 여덟 번째 신랑 토비아스는 달랐다.

그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아내를 안는 대신, 악마를 쫓는 향을 피우고 아내를 일으켜 세워 기도했다.

“저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대목이 핵심이다. 가톨릭교회는 결혼을 단순한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능(아스모데우스)을 영적인 의지(토비아스의 기도)로 제어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본다.

즉, 일곱 번의 죽음과 저주는 역설적으로 ‘육체적 쾌락을 초월한 영적 결합’만이 진정한 결혼이라는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배경 장치로 쓰인 것이다. 그들에게 이 기도는 저주의 주문이 아니라, 죽음의 본능을 이겨낸 승전보다.

죽음 위에서 부르는 희망가: 메멘토 모리

하지만 비평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서늘한 구석이 있다.

토비아스와 사라의 기도는 “우리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저희가 함께 늙어가게 하소서”로 끝난다.

이 문장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바로 앞선 일곱 남자는 늙기는커녕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신혼의 단꿈이 아니라,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내뱉은 절박한 절규였다.

가톨릭 특유의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정서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생의 절정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의 기억을 소환한다.

결혼 생활이 핑크빛 판타지가 아니라, 악마(고난, 유혹, 불행)와 싸우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처절한 현실임을 은연중에 주입하는 것이다.

일곱 명의 시체가 묻힌 과거 위에서 비로소 단단한 가정이 세워진다는 이 지독한 역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낭만을 걷어낸 결혼의 가장 냉혹하고도 정확한 실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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